악녀라는 이름의 판결문

영화 속 다섯 악녀들

by Epiphanes

영화 속 악녀들은 왜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악남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까.


나는 다섯 편의 영화에서 다섯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500일의 썸머의 서머, 포레스트 검프의 제니,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 다운사이징의 오드리,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누군가는 실제로 악행을 저질렀고, 누군가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악녀로 기억된다.


그런데도 이 악녀들이 한데 묶이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총을 들지 않아도, 세계를 폭파하지 않아도, 타인의 삶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파괴는 전쟁이나 음모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악이 아니라 관계와 평판, 서사 속에서 조용히 진행된다. 그래서 정산도 어렵고, 처벌도 불완전하다. 그 미결 상태가 기억을 오래 붙잡는다.


서머는 악녀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보여 주는 시작점이다. 영화 속 서머는 누군가를 계획적으로 망가뜨리지 않는다. 약속을 했다가 뒤집는 인물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이 서머를 악녀로 기억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때 작동하는 것은 사실보다 시점이다. 남자의 기대와 착각이 화면을 지배하면, 거절은 배신으로 번역된다.


애초에 합의가 없었는데도, 합의를 어겼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이 영화에서 악녀는 캐릭터가 아니라 관객의 판결문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누군가의 행동이 악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 규정에는 언제나 ‘내가 기대한 것’이 섞여 들어간다.


제니는 그 판결이 얼마나 쉽게 증식하는지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제니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타인을 상처 입힐 가능성까지 지워 주지는 않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니의 선택들은 포레스트를 가까이 뒀다가 밀어내는 방식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제니는 방황하고, 떠나고, 돌아오고, 결국 병들어 죽는다. 관객이 제니를 미워하는 지점은 ‘떠남’ 자체보다 타이밍이다. 왜 하필 그때였는가. 그리고 영화는 결정적인 정보를 남겨 둔다. 제니의 병명은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이 빈칸은 사실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채워지기 쉽다. 시대의 공기까지 더해지면, 관객은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단정해 버린다. 그 순간 제니의 악녀성은 행위보다 가능성으로 증폭된다. 악녀는 때로 악행이 아니라, 이름 붙지 않은 빈칸에서 탄생한다.


브라이오니는 가장 견디기 힘든 종류의 악녀다. 그녀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삶을 망가뜨렸다. 로비의 명예와 미래를 무너뜨렸고, 세실리아에게서도 삶의 방향과 시간을 빼앗았다. 무엇보다 잔인한 건 둘이 함께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을 통째로 지워 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피해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야 브라이오니는 그들의 행복한 결말을 소설로 써서 내놓는다. 그것을 속죄라고 부르면서.


여기서 분노가 선명해진다. 현실의 피해는 회복되지 않았다. 명예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만든 대체 서사를 내세워, 마치 빚을 갚은 사람처럼 말한다. 속죄는 피해자에게 가 닿아야 하는데, 그녀의 속죄는 결국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더 잔인한 건 권력의 비대칭이 끝까지 유지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브라이오니는 말의 권력으로 두 사람을 망쳤고, 마지막에는 글의 권력으로 두 사람의 결말을 다시 정한다. 피해자들은 끝까지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어떤 잘못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되돌렸다고 억지로 말하는 순간, 속죄는 다시 폭력이 된다.


오드리는 악녀라는 단어를 가장 현실적으로 만든다. 그녀의 행위는 장르적 악행이 아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 다운사이징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갈아타는 선택처럼 그려진다. 그 목전에서 오드리는 남편을 버리고 수술을 받지 않은 채 이혼을 택한다. 더구나 남편은 배신당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모른 채 수술대에 올라간다. 이후 그는 돈도, 체격도, 선택지도 잃은 상태로 남겨진다. 그리고 오드리는 영화 초반에 퇴장한다.


그래서 기억에 더 깊게 남는다. 악당은 보통 끝까지 남아 응징을 받거나 최소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오드리는 갑자기 사라진다. 관객의 분노는 정산되지 못한 채 남아, 주인공의 남은 삶에 붙어 있다. 처벌의 부재는 악녀를 잊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고정시킨다.


그리고 에이미는 악녀의 완성형에 가깝다.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가 남기는 공포는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서사를 장악하는 능력이다.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해자인지, 무엇이 사실인지가 그녀의 손에서 계속 바뀐다.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의 룰을 지배하는 자. 관객은 분노를 넘어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에이미는 악녀가 왜 매혹적으로 소비되는지까지 폭로한다. 악은 끔찍한데, 동시에 이야기의 설계자로서 눈을 떼기 어렵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악녀는 이렇게 기억에 깊이 남는데, 왜 악남이라는 특별한 단어는 없을까. 남성 악당이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절반만 맞다. 더 중요한 건 남성의 악이 오랫동안 기본값처럼 배치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폭력과 권력, 침략과 지배는 서사에서 오래도록 남성 캐릭터가 담당해 왔다. 그래서 남성의 악은 그냥 악당이다.


반면 여성이 그 자리에 서면 그것은 예외로 표기되고 별도의 이름을 얻는다. 언어는 주로 흔한 것에 꼬리표를 달지 않고, 드문 것에 달아 둔다. 악녀라는 말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말이 캐릭터의 본질을 설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예외’를 따로 분류하는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악의 형태다. 남성 악당이 자주 맡는 악은 외부 위협이다. 대부분 주인공이 싸우고, 이기고, 끝내는 구조로 정산된다. 하지만 내가 떠올린 다섯 악녀가 남기는 손상은 관계와 신뢰, 명예와 시간 같은 것들이다. 이 손상은 싸워서 이겨도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결로 남는다. 미결은 기억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미결의 공간에서 관객은 빈칸을 채운다. 문제는 그 빈칸이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결과 빈칸이 무서운 건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자리는 관객이 감정 이입으로 가장 쉽게 채울 수 있는 자리다. 병명이 명시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실을 찾기보다 두려움을 끼워 넣고, 처벌이 생략되면 우리는 스스로 판결을 내린다. 그래서 악녀는 우리가 정산하지 못한 감정의 이름으로 각인된다.


이 구조를 다섯 악녀에 대입해 보면 더 선명해진다. 서머는 악행이 없어도 악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제니는 말해지지 않은 빈칸이 혐오를 증식시키는 방식을 보여 준다. 브라이오니는 속죄가 편집이 되는 순간의 잔혹함을 보여 준다. 오드리는 처벌받지 않는 배신이 왜 오래 남는지 보여 준다. 에이미는 서사 자체를 무기로 삼는 악녀의 완성형을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악녀는 스크린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녀는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방식, 용서와 분노를 정산하는 방식, 그리고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습관 속에서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어쩌면 악녀가 오래 남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더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판단 방식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