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작품에 서명하는가

기계 vs 인간

by Epiphanes

요즘 유튜브에는 AI로 편곡한 음악이 넘쳐 난다. 유명한 팝이 트로트로 바뀌고, 옛 가요가 시티팝 스타일로 다시 태어난다. 명곡들을 다양한 장르로 다시 들어 보는 재미는 분명 있다. 예전 같으면 상상만 하던 일이 이제는 몇 줄의 프롬프트 입력만으로 가능해진 그 편리함 자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그런 콘텐츠를 오래 듣고 있으면 이상한 피로감이 든다. 소리는 대체적으로 거칠고 납작하며, 고역은 귀를 날카롭게 자극한다. 오래 들을수록 음악을 감상한다기보다 압축된 소음을 견디는 느낌이 든다.


재즈로 편곡한 클래식 콘텐츠를 들을 때도 비슷한 불만이 생긴다. 오른손으로 원곡의 주 멜로디를 붓점 연주하듯이 조금 튕기고, 왼손으로 그럴듯한 코드 몇 개를 짚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재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재즈 편곡은 원곡을 다른 언어로 다시 생각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화성을 새롭게 보고, 리듬의 긴장과 완화를 다시 설계하고, 성부 사이의 관계까지 다시 짜야 한다. 그런데 많은 AI 편곡은 장르의 겉모습만 흉내 낼 뿐, 그 장르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는지까지는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결과물은 그럴듯해 보여도, 정작 거기에는 해석의 밀도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AI 생성 이미지를 쉽게 볼 수 있다. 광고와 썸네일, 카드 뉴스와 홍보물 곳곳에 AI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만들기 쉽고 빠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종종 너무 쉽게 AI의 작품이라는 티가 난다. 얼핏 보면 화려하고 정교해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무도 정말로 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이 이상하게도 잘 느껴진다. 디테일은 많은데 시선이 오래 머물 구석이 없고, 형태는 그럴듯한데 왜 저 장면이 저렇게 그려져야 했는지는 비어 있다. 반면 사람이 직접 그린 그림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조금 어설프더라도 묘하게 오래 눈길을 붙잡는다. 선이 조금 흔들리고 비례가 어긋나 있어도, 거기에는 누군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이 분명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단순히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거슬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너무 쉽게 만들어진 결과물에서 자주 느껴지는 가벼움이 거슬리는 것이다. 소리의 질감은 얕고, 편곡을 해도 장르의 외형만 남고, 그림을 그려도 디테일만 번지르르할 뿐 시선이 머물 이유가 적다. 왜 이런 결과물이 피곤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보면, 결국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누군가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버렸는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가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결과물은 있는데 사람의 흔적은 희미하다.


요즘 실제 사람이 편곡하고 연주한 곡들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사람이 한 편곡에는 단순한 장르 변환 이상의 것이 남는다. 여기서는 원곡의 정서를 살리고, 저기서는 과감하게 비틀며, 어떤 부분에서는 자기 취향을 드러내고, 어떤 대목에서는 무언가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집착이 느껴진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AI의 그것보다 더 매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적어도 누군가가 이 곡과 실제로 한 번 더 대화했다는 흔적이 있다. 사람이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더 사랑했고 무엇에서 망설였는지가 보이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물론 여기서 AI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AI는 분명 유용한 도구다. 빠르게 시안을 만들 수 있고, 기술과 장비가 부족한 사람도 자기 머릿속 이미지를 어느 정도 바깥으로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시도조차 어려웠던 일이 지금은 훨씬 쉬워졌고 그 자체로 창작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고치고 덜어 내고 다시 변주한다면, 그 과정 역시 충분히 하나의 창작이 될 수 있다. 다만 효율이 해석의 자리를 차지할 때 문제가 생긴다. 빠르게 나온 결과물이 곧바로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달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묘한 거부감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애초에 작품 그 자체만을 감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작품과 함께 그 작품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도 관심을 가진다. 어떤 화가가 왜 평생 비슷한 풍경을 붙들었는지, 어떤 음악가는 왜 그 시기에 그런 곡을 작곡해야 했는지, 어떤 감독은 왜 그 장면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는지. 작품은 늘 그 뒤에 있는 삶과 함께 읽힌다. 무명 시절의 실패, 오랜 습작, 반복과 좌절, 어떤 상실 이후의 변화 같은 것들은 작품 바깥의 덧붙임이 아니라 때로는 감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결과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견딘 시간과 선택의 흔적까지 함께 읽는다.


고흐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떠올려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진다. 그의 그림은 물론 그 자체로 강렬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붓질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붓질에 이르기까지 그가 견딘 불안, 고독, 집착까지 함께 읽는다. 고흐의 삶은 작품의 부수적인 배경 설명이 아니라, 때로는 작품 감상의 일부가 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동시에, 그 그림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함께 느낀다. 예술은 단순히 잘 만든 결과물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예술은 종종 한 인간이 자신의 감각과 시간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나는 앞으로 AI가 더 발전해 지금의 어색함이 대부분 사라진다고 해도, 인간의 작품이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격차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작품을 볼 때 결과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시간과 망설임, 선택과 집착의 흔적까지 함께 읽는다. 기술이 더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이 차이는 더 선명해질 것이다. 완벽하게 보이는 결과물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작품을 알아볼 것이다. 흠결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분명히 누군가의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