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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스테메 Jan 14. 2020

왜 명절만 되면 조카의 '자궁' 안부가 궁금해지나

가족이란 무엇인가(1)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혼 여성들이 “언제 결혼 하냐”, “이제 애 낳아야지” 같은 명절 ‘잔소리(난 이게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지 않는다)’를 질색하는 이유가 본인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 때문인가 상상하곤 했다. 내가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주 어렸을 적에는 TV에서 보고 들은 바에 따라 ‘노처녀 히스테리(우웩, 이 말은 사어死語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늘 동생이 “이번 설에 집에 언제 갈 거냐”고 물었다. 요가 하는 내내 설 연휴에 혼자 뭘 할지 생각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탈주를 꿈꿨다. 끝나자마자 한국을 뜨는 항공권을 찾아보다 말았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하나 억울했다.    


탈주를 계획하는 이유는 최근 몇 번의 친척 모임에서 난데없이 “애는 언제 낳냐”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집안 경사인 할머니 생신 때마다였다. 재작년 할머니 생신 때 둘째 이모부는 내 손을 꼭 잡고 “소연아, 너네 아빠 소원이 뭔지 알지? 애도 얼른 낳고”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너의 자궁을 통해 아버지의 꿈(?)을 실현하라’는 미션을 주고 간 것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가족들 사이에서 행복감에 젖어있던 기분이 산산조각 나는 동시에 곱씹을수록 안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작년 할머니 생신 때 외삼촌과의 유일한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질문 세례)는 다음과 같았다.


“남자친구는 있고?”
“어제 헤어졌는데요.”
“이제 네가 스타트를 끊어야 뒤에 동생도 결혼하고 애도 낳지”
“...”
“이제 소연이가 몇 살이지?”


너무 전형적이어서 눈 뜨고 당했다. 30초 남짓한 대화에 '명절 어택 4요소(남친, 결혼, 애, 나이)'가 절묘하게 다 들어갔다. “우리 친척들은 모이면 전혀 취업, 결혼 압박이 없어”라고 말하며 살짝 우쭐했던 과거의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그저 내 차례가 되지 않아서였을 뿐, 그리고 내 위의 언니, 오빠들은 때에 맞춰 인생의 과업들을 달성했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자리를 옮겨 식탁 앞에 앉자마자 넷째 이모부의 연타. “소연아, 너 애는 언제 낳을 거야?” 이미 지난 할머니 생신 이후 머릿속에 수백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던 나는, “이모부, 방금 그거 되게 무례한 말이에요.” 했다. 옆에 있던 이모와 사촌동생이 이모부에게 핀잔을 줬다. 이모부는 상처받은 눈치였다. 나는 그 말마저 안 했으면 나야말로 그날 잠 못 이뤘을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결국 다른 이유로도 잠 못 이뤘지만.    


그날밤 나는 ‘악의 없이 던진 말에 내가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며 전전긍긍했다. 결국 다음날 이모부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이모부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조심히 올라가세요 ♡♡♡♡”


명절 때마다 소환되는 '잔소리 메뉴판'. 잔소리가 아니라 관심을 가장한 언어폭력일 수 있다. /인터넷 캡쳐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줄줄이 남는다. 과연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이모부가 나의 불쾌함을 알아채기는 했을까. 왜 감정을 쓰는 쪽은 항상 지나가다 뺨 맞은 사람인가. 산통 깨지 않고 받아치는 방법은 없을까. 애초에 내가 왜 받아쳐야 하지. 분위기를 위해 나의 감정은 무시돼도 되는 건가. “섹스할 사람이 없어서 못 낳고 있어요 하하” 같은 농담이라도 던졌어야 하나.     


이제 명확히 알겠다. 결혼과 임신, 출산에 대한 오지랖이 불쾌한 이유. ‘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스트레스 따위가 아니었다. 나로서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 자체가 당혹스럽다. 누구나 자신 자체로 관심받고 싶어 한다. 가족에게는 더더욱. 상대에게 관심을 주는 대화였다면, 앞서 외삼촌과의 대화에서 "어제 헤어졌는데요"라는 대답에 적절한 위로의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개별적 인간이 아닌 '결혼 적령기 조카'였을 뿐인 나에게는 '나이', '결혼', '애' 같은 키워드를 단 질문이 이어졌다. 한국의 가족 제도 안에서 사랑과 행복이란, 생애 주기에 따른 역할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겨우 주어지는 듯하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어떤 미래를 그리려 하는지, 그 미래에 ‘아이’라는 게 있긴 한지(심지어 이런 주제조차도 내 관심사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정말 1도 궁금하지 않음은 나도 알고 묻는 사람도 알지 않는가. 그렇게 나의 생식 능력이 궁금하면, 차라리 “30대 이상 여성 절반이 자궁근종이 있다는데 너는 몇 개나 되니” 류의 질문이 더 나를 생각하는 오지랖일 게다(설마 이걸 추천질문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기를). 만약 ‘결혼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면 매우 흥미롭게 대화를 이어갔을 테다.     


나는 솔직히 넷째 이모부에게 그렇게 받아치고도 후련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났고 기분은 잡쳤다. 그리고 즐거웠던 친척 모임은 이제 가기 싫어졌다. 안 가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나는 이모부들도 좋고 외삼촌도 좋다. 그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애정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봐온 사람들이다. 즐거운 추억도 간간히 있다. 지금은 소박하고 정 많은 분들이어서 좋다. 세대적 한계 때문에 소통 방식이 서툰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인간에서 자궁으로 전락하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개같다. 인터넷에는 ‘명절 잔소리 대처법’ 따위가 떠돌지만 듣는 것 자체로 이미 기분이 나빠지는데 어쩌랴. 어떤 말로 받아쳐도 통쾌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제 어디서 그런 공격이 올지 몰라 방어 태세를 갖춘 채 가족 모임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진다. 고민이 나만의 몫인 것도 화가 난다. 나는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해 호텔 예약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정말, 이번 설에 어디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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