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

by 이규현


어쩔수가없다 (NO OTHER CHOICE, 2025)

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


독립된 성인으로 어엿하고 싶은 이 마음을 허겁지겁 위태롭게 안고 서른살까지 살아냈다. 나는 지금, 인간성을 따돌리며 자아들을 뭉개고 생략한다는 그 자본주의의 한복판에 있다. 겨우 마련된 형식적 인간친화의 외연들, 이를테면 "(주)000과 함께할 가족을 모집합니다" 같은 슬로건들을 제외하면 자본은 하릴없이 개인을 소외시킨다.


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는 모든 이들의 ‘어쩔 수가 없다’는 그 순간들이 우리 의식을 숙주 삼아 기생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옆 동료의 따뜻함이나 하청업체의 사정을 조그맣게 만들고, 위악을 떨어대며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습관은 단연 돈이 인간의 머리위에 있는 까닭이다.


<어쩔 수가 없다(2025)>라는 영화가 등장하기 전부터 어쩌면,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했던 내 삶의 하한선이 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때면 적어도 다시금, 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허나 어찌되었든 물살을 반대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기에 이는 무척이나 피곤하고 무력한일이다.


관자놀이를 두들기며 그야말로 세뇌에 가깝도록 모든 일에 어쩔 수가 없었다라는 동력으로 행하는 만수의 사투. 뱀에 물리거나 속이 메스꺼워 구토를 할지 언정 동분서주하여 결사적으로 계획을 이행한다. 그는 시신들을 매장하고, 아들이 도난한 핸드폰들을 매장하며 그 위에 나무를 심는다. 이미 우람하게 자라난 나무들 밑에는 그의 아버지가 매장한 돼지들의 시신이 자양분이 되었다. 더러운 부정과 부조리를 묻으면 그를 양분 삼아 자라나는 나무들이 비열하고 섬뜩한 순환을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란 만수의 실직에 대한 대처에 있다. 애시당초 만수는 경쟁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 자리가 불변으로 하나라면, 나머지는 사람들은 모두 해치워야 한다는 해고자들의 제로섬적 시각에는 고용자들 차원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당연스레 배격되어있다. 철저히 해고자 시선에서의 미장센은 심지어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2024)> 마저 떠올리게 한다.


기묘한 착란 속에서 벌이는 더러운 악다구니를 감내하며 끝끝내 본인이 일궈놓았던 낙원을 되찾아오는 서사는, 만수의 끊임없는 혼잣말로, 관객들의 환청이 되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에 가닿는다.


그러나 과연?


아들은 아빠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의심을 은연 중에 거두지 못한다. 아내는 남편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대해 거의 확신한다. 오래 전, 가족과의 신뢰를 뒤흔들었던 지독한 술버릇을 다시금 경계하게 되었다. 난생 들을 수 없었던 딸의 첼로 연주는 공교롭게도 아빠가 출근을 하고 난 뒤부터 펼쳐졌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뭉개며 과녁의 눈을 자꾸 피하다보면 어느새 자기 삶의 과녁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있다. 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 불편함을 비집고 들어가 다시 생각하는 것. 돈버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 자본과 계속 대척하는 길을 내달리는 인간미는 그런 식으로 쌓이게 되어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일에 맞설 수 있다.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러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 - 프랑수아 트뤼포

실직자의 비애, 고용 불안정, 계급 의식 같이 너무도 뻔하디 뻔한 사회문제를 다루어서 <어쩔수가없다>가 별로다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제법 많던데..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같은 소재일지라도 그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독창성을 발휘해 다루는지, 생각거리와 질문을 던지는지가 영화의 근본 존재론입니다.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기생충>은 늘 정치 사회면에서 거론되는 계급 문제를 다루는데, 그렇담 <기생충>도 재미없고 별로인 영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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