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으로 묶어버리면 다채로워지는 것을...
난 인간관계에 대한 정의가 비교적 단순하다. 나에게 관계란 인간 대 인간으로 쌓는 폭넓은 의미의 우정이다. 물론 속한 장소에 따른 나의 역할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한다. 보통 조직생활에서의 인간관계를 서로 이해가 걸려있는 관계라고들 말한다. '이해(利害)', 한자로는 이로울 리, 해할 해다. 나에게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따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난 인간관계를 이해관계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건 공적 영역이라도 마찬가지다. 조직이라는 공간 안에서 나의 확실한 역할이 있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공적 영역이 침해받지 않아야 하고 나의 이익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가장 중요한 선만 지키면 된다.
나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는 마음은 본능임을 알기에 가끔은 나 자신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경계하고 선을 긋는다. 이건 HR 전문가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본적인 선만 명확히 지킨다면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직원들은 가끔은 섭섭했을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간적인 섭섭함을 길게 마음에 두지 않을 만큼 그들 역시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하는 멋진 사람들이다. 몇 군데의 회사를 퇴사한 후에도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사적 영역에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도 나의 인생 어딘가에 자리할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이익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해관계로 시작한 게 아니라면 조직이라는 공간의 지속성이 없어도 그들은 여전히 인생에 우정으로 남는다. 퇴사와 동시에 직무나 직급에 의한 공사 구분을 예전처럼 명확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비슷한 의미로 '나이'나 '국적'도 나의 우정에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농담처럼 위아래로 20년은 우정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종종 얘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30대 이후 내가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세 분의 대표이사님들과의 관계도 조직이라는 공간에서의 관계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금은 그냥 우정이라 생각한다. 애초부터 이해(利害)에 바탕을 두거나 내가 무조건 맞춰야 하는 수직적인 관계로 시작하지 않았기에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사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을 원한 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관계란 항상 쌍방향이니까... 어느 한쪽에서만 중심이 확실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의 인복 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뵈면 정신없이 수다 떨다가 4-5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인생에 더 경험이 많고 지혜가 있는 분들이니 좀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또래와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관계가 아닌 넓은 의미의 우정이다. 나에게 우정이란 나이와는 무관하다.
몇 년 전 회사를 퇴사하고 밴쿠버에서 4개월가량 머무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멕시코 친구와는 몇 개월 동안 서로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자기중심이 뚜렷하고 독립적인 친구였다. 마지막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 헤어질 즈음에 우리가 14살 차이라는 걸 알고 한참을 웃었다. 나이와 호칭 문화가 확실한 우리나라였음 불가능할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열린 마음이라고 해도 14살 차이라는 걸 안다면 바로 14살 위인 사람으로 나를 대했을 거다. 나이와 관계없이 이름만으로 불리는 문화였기에 친구로서의 우정이 가능했다. 그곳에서 20대 중반의 나이에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멋진 한국인 동생들도 만났다. 그 모습이 참 예뻤다. 자신의 중심을 갖고 스스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내 기준에서 멋진 사람들이다. 생각이나 사고가 멋진 사람들과는 나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우정이 가능하다. 나이가 많다고 그 사람에게 배울 점이 많은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살아온 세월만큼의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면 어른에 대한 예의와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이름뿐인 존중만 받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오히려 상대방의 진정성 있는 존중을 받을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비례가 아닌 반비례 관계다.
난 인간관계에 있어 선을 긋지 않고 열린 마음이지만 관계 자체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가 좋다. 그런 의미로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내 인생에 들어왔다가 잠깐 머물다 가는 사람도 있고 오래 머물 거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관계도 있다. 한쪽에서 의도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하는 관계는 불편하다. 다만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노력이 아닌 나의 진정성에서 비롯된다면 상관없다. 진정성이 아닌 나의 의식적인 노력이 계속해서 필요한 관계라면 그 역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나이, 국적, 만난 장소에 관계없이 인간관계를 정의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 열쇠는 내가 갖고 있다. 이해관계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딱 그 정도의 관계성으로만 대하면 된다. 애초에 그만큼의 마음만 내어줬으니 그다지 실망할 일도 없다. 진정성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고 싶다. 그건 나의 마음이 받을 걸 생각하지 않고 내어주는 진정성이다. 인간관계의 주고받음이 어떻게 자로 잰 듯 똑같을 수 있을까? 주고받음을 계산하는 그 마음에 이미 그 관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담겨있다. 관계로 소진될 필요도 없지만 이익을 계산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잘 됐을 때 좋은 자극은 받을지언정 시기나 질투로 관계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 또한 시간과 에너지 낭비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굳이 남과 비교하는 마음 자체가 무의미하다.
난 늘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 우정이라는 흔적을 나의 인생에 남겨왔다. 다양한 학교와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해외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 외부 교육을 통해 만난 사람들, 친구의 친구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내 인생에 쌓이고 쌓여 현재가 되었다. 이해관계,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의식했다면 어려울 일이었다. 또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들어올 거라는 걸 안다.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보다는 충전을, 내 감정의 하수보다는 고수가 되겠다 결심한 건 나의 선택이었다. 인생이 결심만으로 되지 않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깨닫고 배우며 여전히 채워가고 있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방전시키지만 좋은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관계의 주체인 내가 어떤 관계를 그려나갈 건지 선택하면 된다. 그러려면 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어떤 관계를 써 나갈 건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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