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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람 Jul 10. 2024

어떤 말

2부

  


  언니가 17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여느 보통의 가정처럼 행복한 가정을 흉내내려고 애쓰던 우리 가족은 최근 들어 비교적 잦게 열리던 (그래봤자 1달에 2~3번이었지만) 가족 회의를 열었다. 가족 회의가 열리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아빠의 출근 시각 즈음에 엄마와 아빠의 탁한 대화가 들리거나, 언니가 짧은 가출을 하고 돌아온 다음이었다. 오늘은 다행히 전자였다. 적어도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처럼 회초리 맞을 일은 없다는 거니까. 이 날 가족 회의의 주제는 이러했다.



-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면 너희는 누구한테 갈래?

  


  나로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입을 열어 엄마를 선점해야 했다. 그래야 아빠를 유일한 선택지로 둬야 하는 언니의 심정 따위 모를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엄마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언니는 나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답답한 아빠랑 살아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등지고 있는 거실벽 윗쪽에 걸린 시계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을 때까지 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누가 쫓아올 새라 입을 열었다.



- 엄마요.

- 그럼 너는. 누구한테 갈 건데?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입꼬리를 꾸역꾸역 내린 나는 언니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니, 사실 입을 열든 말든 상관 없었다. 그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언니는 입을 다물었다. 혓바닥으로 채찍질하던 아빠도 그 옆에서 찌푸린 미간으로 언니와 나 사이를 줄곧 응시하던 엄마도 결국 언니의 침묵에 기권했다. 그 나이 먹고도 같은 방을 쓰던 나는 언니를 졸졸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바람결에 문이 닫히자마자 언니에게 물었다.



- 아빠한테 갈 거야?

- 미쳤냐 내가. 가고 싶으면 너나 가.

- 싫어. 난 엄마한테 갈 거야.

- 그러던지.



  어차피 똑같을 텐데.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언니는 도서관을 간다며 가방을 책으로 가득 채워 곧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상하지 않았다. 언니는 엄마를 닮아 매서운 눈빛으로 누군가의 눈과 눈 사이의 미간을 응시하고는 했고, 절대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니의 그런 눈빛을 불쾌해 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언니의 생존방식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언니는 20살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다. 성적우수장학생으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다. 언니는 단 한 번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가끔씩 내가 전화를 걸 때면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올라와'라는 말과 함께 짧은 통화를 끝마쳤다.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먼지 쌓인 편지가 되고 말았다.



  엄마는 언니가 서울로 올라간 이후, 혼자 방을 쓰게 된 내 방으로 종종 찾아왔고 찾아올 때마다 과일을 깎아 내게 건네주었다. 기뻤다. 티는 안 내려고 했겠지만 내심 나보다 잘난 언니에게만 쏟아지던 관심이 나는 줄곧 못마땅했다. 울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언니는 없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 네 아빠를 어떻게 해야 되겠니.



  엄마의 질문은 대체로 그러했다. 답이 정해진 질문을 들고 와서 나에게 다른 정답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능을 앞 둔 17살이었고, 엄마는 나보다 30년은 더 넘게 나이를 먹은 어른이었다. 누구보다 정답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에게 굳이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만이 엄마의 안식처가 되고 정답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책임감과 죄책감이었다. 엄마를 지금까지 저 크고 공허한 방 안에 홀로 두었다는 죄책감. 몸도 목소리도 작았던 나는 언니와 달리 차마 엄마를 함부로 대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는 아빠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와 정확히 반비례하는 증오와 원망이 마음 속에 자리했다. 그것을 양분 삼아 나에게 대화를 청한 엄마에게 실토했다.



- 이혼해, 엄마.



  그 말에 엄마는 분명 나를 응시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한숨만 푹 쉬어댈 뿐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엄마를 이해했다. 친척들이 수군댈 것이고, 사회가 낙인을 찍을 것이다. 아무리 개방적인 대한민국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사상에 찌들어 있었다. 흠이 많은 여자. 남편을 잘 내조하지 못한 여자. 나약한 여자. 한 번 쓰였다 버려진 여자. 오로지 엄마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그런 말 들어도 괜찮아'였다. 정작 그 말들은 내가 듣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잖아? 남인데. 나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러다 엄마가 점점 내 방에 아무 것도 없이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1달에 3번 정도였던 횟수는 일주일에 3번으로 늘어났고, 그 때마다 엄마는 비슷한 아빠의 행태에 푸념과 한탄을 늘어놓고는 했다. 돈은 똑같이 벌어오는데 왜 나만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냐는 둥, 저 인간 저러다가 혼자 살게 되면 어떡하냐는 둥, 집안일이라고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밖에 몰라서 큰일이라는 말들. 그런 형형색색의 미운 말 속에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동정하는구나. 엄마는, 아빠를 쉽게 떠나지 않겠구나. 그 생각이 들자 숨이 턱막혔다. 끝도 없이 바닷물을 들이켜야 했다. 마실수록 갈증이 났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으므로. 그래야, 내가 이 집에서 살 수 있었으므로.



  어쩌다 불행히 시간이 딱 맞아 떨어져서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같이 하는 세 식구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 중 가장 안쓰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엄마는 집에 돌아오면 조금 더 늦게 들어올 아빠를 위해 밥을 안치고, 묵은 반찬 대신 새롭게 사온 고등어를 굽고, 국을 데우고, 썩어가기 직전인 채소들을 다듬었다. 그러다 아빠가 돌아오면 나보고 밥을 퍼 담으라고 했다. 나는 눈치껏 냉장고에 있는 묵은 반찬통들을 꺼내어 뚜껑을 벗기고, 수저를 놓고, 국그릇도 개수에 맞춰 찬장에서 꺼내놓았다. 아빠는 국그릇에 국을 퍼담고는 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열무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그러면 아빠는 자리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엄마에게 무심히 말을 던졌다. 그렇게 찢어질 듯한 침묵 속에서 세 식구가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면 나는 혼자서 100m 질주를 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밥을 먹어치울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나는 식사를 할 때만큼은 그 어떤 무지한 농담도 실없는 웃음도 견뎌내는 초인이 되었다. 밥그릇을 빠르게 비운 나는 잘 먹었습니다, 한 마디와 함께 방으로 도망쳤다.



  늘 그렇듯 배가 고팠다. 빠르게 채운 배는 금방 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방문 밖으로 텔레비전을 켜는 소리가 들리면 식사가 끝났겠거니하고 지레짐작했다. 설거지는 어쩌다 한 번씩 아빠가 했다. 늘 설거지를 아침으로 미루고 마는 아빠를 엄마가 견디지 못했고, 어차피 아침에는 이것저것 반찬과 국을 만들고 난 엄마가 설거지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아빠는 음식물 쓰레기와 설거지 말고는 집에서 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기민해진 귀와 눈을 애써 무시하고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엄마를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이 열리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다. 앵무새보다도 못한 우리 엄마. 그렇게 잔뜩 허기진 마음으로 방 안에 숨죽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문이 열렸고, 나는 또 지난한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나도 스무 살이 되었다. 언니처럼 독하게 공부하지 못한 탓도 있었고,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서울로 떠날 수는 없었기에 통학 가능한 거리의 대학에 갔다. 내가 가고 싶은 과를 갔지만, 막상 가보니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망했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명 이보다 망한 인생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온 힘을 다 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다시 새로운 시작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말 그대로 제정신이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몸이 지친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눈과 머리가 피로해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뜬 것처럼 수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몸을 더 피곤하게 하면 잠이 올까 싶어 하고 싶은 운동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찾아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운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더 빡세게 공부를 하면 잠이 오겠지 싶어 아침 7시에 눈을 뜨고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그리고 새벽 서너시에 겨우 잠들었다.



  그 패턴에 익숙해질 무렵, 아침에 책을 펴고 자리에 앉으면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날벌레를 찾아다녔다. 귓가에는 그 어떤 벌레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윗집에서 드릴을 사용하거나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내 귓가에서는 파도가 빠져나가는 소리, 어쩔 때는 날벌레가 위잉위잉 날아다니는 소리, 어쩔 때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비인후과에 찾아갔다. 의사는 내 이명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난청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귀에 이상이라고는 이어폰을 자주 낀 탓에 생긴 중이염 밖에 없었다. 덕분에 중이염을 치료하게 되었으니 이명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던 나는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빗소리, 피아노 소리, 천둥번개 소리, 사람 말소리 ASMR을 듣기도 했다. 아예 밤을 새서 수면 패턴을 되돌려보려고도 했다. 어쩐지 돌처럼 무거워지는 몸을 끌고 걷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의 눈가는 점점 퀭해져만 갔고,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앉아있기도 힘들어서 누워만 있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가관이었다.



- 아, 2주 뒤에 마감인 과제 오늘 완성해서 제출해야 중간고사 공부를 한 달 전부터 시작할 텐데...



  컨디션의 변화도 있었지만 내 사고의 중심은 어느새 10대 초반 무렵의 나로 돌아갔다. 때는 4월 말이었다. 기후변화로 벚꽃잎은 이미 진 지 오래였고, 느티나무며 벚나무며 할 것 없이 모든 나무들이 새파란 초록잎을 살랑거리고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중간고사도, 대체 과제도 모두 끝나 한숨 돌릴 시기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엄마는 급하게 생긴 일을 처리하러 외출을 했고, 나에게 수선을 맡긴 옷을 수선집에 가서 찾아오라고 일거리를 주었다. 짧은 거리의 외출을 하더라도 운동화를 신는 습관이 있던 나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한 손에는 수선된 옷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 눈 앞에는 1시의 태양이 나뭇잎 위로 쏟아내려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나뭇잎이 참 아름답구나, 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 죽었으면 좋겠다.




  세상을 향한 반항 따위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나의 죽음을 바라는 말이었다. 어른들은 순진했다. 죽음을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한 아이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걸. 아이가 입 밖으로 죽음을 내뱉지 않으면 한숨을 내돌리는 어른들은 멍청했다. 이기적이었다. 끔찍했다. 추악했다.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가. 다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했던가. 엿이나 먹으라 그래.



  머리가 자란 나는 그 때의 나와는 달랐다. 종이로 된 일기장에 일기를 적지 않았다. 따라서 들킬 일이 없었다. 종이 일기장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고는 눈치채기 어려운 만큼 은유적인 표현들로 채웠다. 그것은 분명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20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향한 나의 사랑은 지독하리만치 아름답지 못한 애처로움으로 가득했다. 나는 치기 어린 사랑을 하는 순애보로 비춰졌고 어른들은 별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내게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무관심이란 보통의 상태였다.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가 내린 '우울증'이라는 진단 따위는 다 거짓부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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