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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일단 시작합니다

by 에솔프 ESORP


시작은 설렘과 같은 크기의 두려움을 동반한다. 학년이 올라,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교실을 찾아가야 하는 삼월의 첫 번째 평일마다 그랬다. 담임선생님의 성함은 알지만 어떤 사람일지 몰랐던 그때의 마음이다.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이름이면 호기심도 커진다. 첫째 날은 새로운 반에 들어가기 전부터 언제 나올지 가늠해 봤다. 선생님이 집에 빨리 보내줄 만큼 가타부타 따지지 않기를 바랐다. 짧은 전달사항도 중요하지만 어떤 친구와 일 년을 보낼지가 우선순위의 제일 위에 있었다. 올해 새로 알게 될 친구는 몇 일지, 몇 명의 무리를 이룰지도 궁금했다. 처음을 맞이하는 때가 오면 항상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기대와 불안이 섞여있다. 얼마나 좋을지 나쁠지 모를 불확실의 주사위를 쥔 손처럼 땀이 밴다.

여러 번 시작을 겪으며 익숙해 질만도 했지만, 음식을 본 개가 침 흘리는 걸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흥분하는 건 똑같다. 아드레날린 분비는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순서가 다가오기 전, 앉아있을 때부터 두근거렸다. 세 시간 전부터 행복했던 여느 행성의 여우처럼. 이제 일어서서 앞조 바로 뒤편에 섰다. 금세 앞을 가려주던 친구가 신호와 함께 멀어졌다. 차례가 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의 모래를 흩뜨렸다. 흰색 출발선을 밟지 않도록 디딤발의 위치를 바투 잡았다. 평소 다리가 붙어있는 걸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이 선 앞에 서 있을 때만큼은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총성이 들리면 땅을 박차며 당길 구름발도 마찬가지다. 길고 짧은 건 정말로 대봐야 안다. 자신이 거북이인지 토끼인지 뛰기 전까지는, 결승선에 가슴을 내밀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뜀박질 그게 뭐라고. 한 번의 달리기로 목숨을 내놓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더 빠른지가 크게 중요한가. 중간에 넘어져도 괜찮다. 엄청 늦어진다면 늦은 김에 여러 그루 늘어선 교목이 바람과 함께 춤추는 걸 구경해도 괜찮지 않나. 어쨌거나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남의 바짓가랑이는 붙들지 말고. 어차피 결승선은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다. 꼴찌로 들어간다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가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한 번 힘을 받은 공은 멈추기까지는 계속해서 구른다. 시작하면 그 후는 알아서 저절로 이루어진다. 실제로도 그렇다. 물건을 밀 때면 최초로 움직이게 만들기까지 가장 큰 힘이 든다. 움찔하는 순간부터는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오늘도 다음 글의 첫 문장을 일단 써놓기는 했다. 총성이 울리면 앞을 볼 필요는 없다. 박차고 나아가기 위해 넘어질 듯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게 먼저다. 넘어지려는 힘으로 가속을 받는다. 옆이나 뒤를 돌아보는 건 결승선을 한참 지나고 숨을 고르며 해도 충분하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떴고 졌으며, 내일은 또 해가 뜨고 질 거다.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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