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라는 것은 본디 두 세계를 잇는 것이 아닌가.
아를은 남프랑스의 빛과 색이 살아 숨 쉬는 도시였다. 프로방스의 햇살이 담벼락에 어깨를 겯고 있었고, 건물의 창문마다 색색의 꽃이 만발했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돌담과 붉은 지붕, 초록 덩굴은 물감처럼 진하고 선명했다.
골목마다 색채가 머물러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고흐는 파리의 회색 하늘을 떠나 이곳을 택했다. 그는 아를의 빛을 색채로 옮기기 위해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해바라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테라스’ 등을 캔버스에 그리며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그림 속의 도시를 자박자박 걷는 일은 고흐의 시선을 뒤쫓아 가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쯤 멈추어 서서 붓을 들었을까. 그는 거리의 어느 창 아래에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적셨을까. 그는 무엇을 응시하며 말을 걸었을까. 나는 고흐의 발자취가 스며든 강가의 언덕에서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곱씹어 보았다.
론강을 따라 걸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이 아름다웠고, 저 멀리 작은 배들이 강물 따라 출렁였다.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 속의 별빛이 비추는 강을 떠올리며 찾아간 길이었지만, 나는 정작 한낮의 론강 앞에 서 있었다. 고흐가 본 별빛의 강물은 어둠 속에서 더 찬란했지만, 내 눈앞의 강물은 밝음 속에서 고요했다.
나는 고흐가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렸다는 지점에 서 있었다. 별빛이 강물 위로 부서진 날, 그는 아마 밤의 정적 속에서 붓을 손에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겠지. 눈으로 별을 쫓고 마음으로 고독을 붙잡으며, 하늘과 강물 사이에 놓인 다리를 그렸을 것이다.
그가 아를을 사랑한 만큼 도시는 그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아를 사람들이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지극히 평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고흐는 사람의 언어보다 빛과 색의 언어를 믿게 되었으리라. 그는 말로는 다 쏟아낼 수 없었던 내면의 열기와 고독, 사랑과 불안을 붓 끝에 담아 표현했다.
론강 옆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고흐가 그렸던 카페가 나왔다. 벽면에 ‘카페 반 고흐’라고 적힌, 카페는 아직도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밤의 카페테라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노란 천막, 고흐가 별빛 아래 꿈꾸었던 밤의 풍경이 펼쳐졌던 곳이다. 그림 속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이 여행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카페는 뜻밖에도 임시휴업 중이었다. 남프랑스의 따스한 햇살이 천막에 누워 있고, 붉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기대했던 커피는 없었지만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고흐가 올려다보았던 아를의 밤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 아쉬움 속에서 오히려 고흐의 마음이 조금 더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도 수없이 닿지 못한 꿈과 소유할 수 없었던 것들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겠지.
그래서 고흐의 그림은 내가 감상할 때마다 더 빛이 났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닿지 못한 것을 향한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기에 더 전율을 느꼈다. 고흐가 별을 그렸던 밤, 그는 별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지만 가질 수는 없었다. 나도 밝고 눈부신 한낮의 카페 앞에서, 고흐가 머물렀던 밤을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밤이 될 때까지 머물 수는 없었다. 나와 고흐는 간절하게 원했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었다는 접점을 공유했다.
고흐가 그렸던 ‘랑글루아 다리’의 배경지에도 가보았다. ‘고흐의 다리’라고 불리는 오래된 도개교가 허공을 향해 벌어진 나무처럼 서 있었다. 고흐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는 나에게 무척 인상 깊은 곳이었다. 다리라는 것은 본디 두 세계를 잇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고흐의 다리’를 보면서, 나와 고흐가 살았던 세계의 이쪽과 저쪽, 어제와 오늘, 삶과 예술을 비교해 보았다.
문득 내 안에도 다리 하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와 현재, 나와 타인,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감정들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건너며 고흐에게 가 닿았다. 그의 붓 끝에 맺혔던 외로움과 열망, 침묵과 바람 소리를 체감하며 아를에 남겨진 고흐의 그림 속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시나브로, 고흐가 자연에서 치유 받았던 것처럼 나도 아를이 다양하게 펼쳐주는 빛과 색 속에서 위로 받았다. 고흐를 향한 그리움이 내 마음속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흘렀다. 윤슬에 눈이 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