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제11회 포항소재문학상 수상작 (원제: 벽화마을, 거닐다)

by 정미영

푸른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마을이다. 나지막한 집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앉아 있기에 온통 쪽빛으로 일렁인다. 느림이 빠름보다 대접받는 곳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내 일상이 잠시나마 여유라는 쉼표를 찍는다.

햇살을 등에 업고 장기면 벽화마을을 거닌다. 골목길이 풀어놓는 이야기에 물들고 싶어 무작정 마음 하나 구겨 넣고 찾아갔더니, 터줏대감인 양 바닷바람이 먼저 맞이한다. 세상의 모든 바람은 한번쯤 여기로 왔다가 다시 제 갈 길로 가는 듯하다. 나도 바람 한 점이 되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으니 말이다. 내 몸속에 쌓여 있던 소리와 해류 타고 넘어온 바람 소리가 서로 부딪히는 순간에 모든 관념이 상쇄된다.

퇴색되었다는 것은 새롭게 단장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빛바래고 낡은 이미지가 물씬 풍겼던 골목길에 따뜻한 이들의 사랑과 관심이 보태져 산뜻한 그림이 곰비임비 깃들자, 마을은 변했다. 도심이 발달함에 따라 다소 허름하게 느껴졌던 바닷가 마을이라도, 담장마다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니 공간적으로 도시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골목길에는 삶의 흔적과 애환이 담겨 있다. 여기 신창리 골목길에도 바닷물에 삶을 담그고 사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얼비친다. 희붐한 새벽이면 손질한 삭구나 어구를 들고 짙은 해무를 헤치며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이다. 바다 사나이들의 얼기설기 얽힌 무수한 생활의 편린이 조각보마냥 바느질되어 있기도 하고,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춰져 있는 곳도 있다. 개별적 예술 작품으로 내걸려진 흔적들은 지루하지 않고 인상적이다. 신명난 풍어를 기대하며 바다라는 무대에서 거침없는 만고절창(萬古絕唱)으로 노래하는 어부들의 가락이 묻어나오는 듯해, 내 온몸이 한순간 감동으로 저릿하다.

휘돌아 거닐던 골목 귀퉁이에서 연탄재를 만난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 한순간 빗장뼈를 곧추세워 펄떡인다. 우리 집은 리어카 한 대 겨우 지나다녔던 골목 어귀에서 단칸방에 딸린 구멍가게를 했다. 내 마음에 다른 것은 몰라도 연탄 파는 것이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주인집 허락을 받아 마당에 차곡차곡 연탄을 쟁여 놓고 배달을 했는데, 나는 탄가루가 날리어 마당이 지저분해지고 까매질까 걱정되었다. 주인집에는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놀릴까봐 신경이 쓰였던 탓이었다.

아버지의 러닝셔츠에 새까만 연탄 가루가 묻히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회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주인집 아저씨와 내 아버지가 비교되어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병원으로 실려간 뒤에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그토록 싫다고 했던 연탄이 무서움의 대상이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부지런히 일해도 빠듯하기만 했던 살림살이에 연탄 판매를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간의 눈금 앞, 이렇게 골목길에서 연탄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그때의 열등감과 잊고 싶었던 기억의 한 자락마저도 새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담장에 기대어 정물(靜物)처럼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아주머니들과 인사를 나눈다. 테왁을 옆구리에 끼고 푸르스름한 바다를 건져 올리기 위해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해녀들이다. 자식들을 잘 건사해 보리라는 책임감으로 테왁과 한 몸이 되어 해산물을 잡아 올리는 그들은 순리에 따르는 듯 유순하게 어촌을 지키고 있다.

멸치와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피데기를 사서 씹었더니 입안 가득히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긴다. 바다의 지문을 온몸으로 기억한 채 말라가는 멸치와 오징어는 어부들의 생활비요, 자식들을 위한 학비다. 후릿그물로 물고기 떼를 훑어도 바다는 아낌없이 자신이 품고 있는 것들을 번번이 내어준다.

해변 끝자락에 있는 일출암으로 발길을 돌린다. 장기천을 따라 내려오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생수가 솟아나기에 날물치라고도 불린다. 바위 틈새로 그림자처럼 붙어 자란 소나무들과 그 사이로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어서, 새해 첫날에는 돋을볕을 보며 소원을 빌기 위해 장기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다산 정약용은 장기천 주변의 느릅나무 숲을 거쳐, 일출암 가까이에서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구경했다고 한다. 유배 생활의 비통함과 외로움을 시심(詩心)으로 달랜 다산의 마음을 느끼려고 눈을 감고 들숨을 크게 쉰다. 한순간, 다산의 시 구절이 갈매기 떼처럼 날아올라 귓가를 맴돈다. 내 마음에 긴 여운이 남는다.

해안 절벽으로 다가간다. 검푸른 동해가 감춰 놓은 연오랑세오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해 자꾸만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진모리와 중모리를 섞은 파도의 리듬이 울림 깊은 화음을 이룬다. 절벽 아래에는 몇몇 낚시꾼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중국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태공망이 낚시하며 때를 기다렸듯 그들 또한 기회라는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일까? 기회라는 낱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니, 벽화마을 또한 기회를 잘 잡은 것 같다. 폐선처럼 낡아가던 도중에 마을 재생이라는 기회를 잡아 화려하게 회생되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 지향적이다. 세상을 이끄는 중심이 있다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가장자리가 있다. 도시가 빛나려면 중심인 시내와 가장자리인 장기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소봉대 앞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치고자 결사 항전했던 충절의 전통이 내려오는 곳, 우는 바위 전설이 내려오는 벽화마을의 역사가 소중하게 보존될 때 사람들의 감성은 메마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촉촉이 적셔질 수 있으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에 다시 선다. 벽화마을로 재탄생되기 전, 한적한 처소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은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그것은 신창리가 무관심으로 잊혀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통의 징검돌로 벽화를 이용한 덕분이다. 삶의 다양한 발자취를 감성적으로 느끼길 바라며 회화적으로 풀어놓았기에 수많은 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방문객들이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그들의 코발트빛 추억이 물결처럼 살랑거리며 돌아다니는지 여기저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리들이 시간의 곡선을 따라 둥글게 맴돌다가 양귀비꽃을 피워냈는가. 함초롬히 피어 있는 자태가 눈부시다. 마주보는 인연의 눈빛에 꽃색이 더욱 짙어지는지, 보면 볼수록 붉디붉다.

벽화마을이 내 마음자락으로 옮겨 앉는다. 골목길에 느낌표로 머물고 있으니, 아련한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그리운 추억은 윤슬이 되어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포말을 쉼 없이 일렁인다.

망각된 것은 추억으로 호명할 수 없다. 내 안의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내 기억의 퇴적층에 깃들어져 있는 골목길에 대한 단상을 부여잡은 채 나는 한참 동안 벽화마을을 거닐고 있다.


제11회 포항소재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