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6년 차에 매출 규모가 큰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입사 후 줄곧 매출 규모가 작은 부서에서만 근무하면서 쌓였던 설움이 있었기에 드디어 큰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거래처의 태도였다. A라는 업체의 부장님은 내가 새 담당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본사까지 오겠다고 했다. 편도 2시간이나 되는 거리였기에 급한 일이 아니면 메일로 소통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 부장님은 꼭 직접 인사하고 싶다고 하셨다.
부장님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꾸미지 않은 수수한 타입이었지만 깔끔한 옷차림과 똑 부러지는 말투 그리고 깍쟁이처럼 보이는 안경까지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꺼내실 줄 알았지만 의외로 내 결혼여부를 물으셨다. 공과 사가 확실해 보이는 첫인상이었기에 그 질문이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A 부장님: 혹시 결혼하셨어요?
나: 네 작년에 결혼했습니다.
A 부장님: 아 그러셨구나. 제가 실례했네요. 당연히 아직 결혼 안 하신 줄 알고 제 친한 동생 소개 해 드리려고 했거든요. 이대 나온 디자이너인데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요.
어색한 첫인사를 마치고 바로 30분 정도 업무 이야기를 나누었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로 마무리되었다. 본격적으로 업무를 파악하고 보니 우리 부서가 A 업체에 주는 오더가 예상보다 많았다. A 업체 전체 오더의 80%가 우리 부서 오더였고 오더가 끊기면 A 업체는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왜 이렇게 급하게 나를 만나고 싶어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3년을 함께 업무를 하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많이 쌓였다. 조금이라도 오더가 줄어들 때면 부장님은 나를 찾아와 너무 힘들고 걱정된다는 얘기를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도움을 드렸다. 부장님은 1주일에 한 번씩은 회사로 찾아와 커피를 사주시며 업무 얘기도 하고 인생 선배로서 회사생활이나 재테크에 대한 조언도 해주셨다. 부장님은 내가 가끔은 친동생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우리 부서는 회사에서 가장 일이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워커홀릭이라고 소문난 팀장님은 퇴근 후, 주말에도 집에서 업무를 하셨고 팀원들도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대기를 해야 했다. 심지어 한 후배는 신혼여행 가서도 발리에서 하루에 2시간씩은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이런 생활이 3년간 계속되면서 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나는 부서 이동을 신청했고 매출 규모가 현재 부서의 1/10도 되지 않는 신생부서에 배치되었다.
명함에 따라 바뀌는 인간관계
부서 이동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A 부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업무강도와 팀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부장님은 내 거처보다는 새로운 담당자가 누구인지를 더 궁금해하셨다. 일로 만난 사이지만 3년간 마음을 터놓고 지냈기에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1주일 이후 인수인계가 끝나고 새로운 담당자는 A 부장님과 첫 미팅을 하고 돌아왔다. 미팅을 마친 새로운 담당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라고 묻자 새로운 담장자는 “A 부장님이 저보고 미혼인 줄 알고 소개팅 시켜주겠다고 하던데요. 이대 나온 디자이너 동생이 있다고. 제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봐요. “
주변을 봐도 명함에 따라 인간관계가 확 바뀌었다는 경우를 많이 봤다. 대기업 구매팀장으로 20년 근무하고 퇴직했더니 10년 동안 많은 도움을 주고 친하게 지냈던 거래처들이 연락을 피해 충격받았다는 이야기, 퇴사했더니 잘 따르던 후배들이 연락을 반가워하지 않아 씁쓸함을 느꼈다는 이야기 등등.
갑자기 신입사원 때 한 선배의 조언이 떠올랐다.
"거래처 사람들이 잘 대해주는 건 너라는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네가 가진 명함 때문이야."
그 부장님이 나에게 잘 대해줬던 것도 그리고 태도가 확 바뀌었던 것도 결국에는 내 명함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업체를 만나 미팅하고 업무를 해왔다. 처음 만난 날부터 과하게 친절한 거래처도 있고 명절, 생일 때마다 먼저 인사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퇴사를 하면서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지만 예전 부장님 때처럼 허탈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내 명함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인간관계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