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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기억의 씨앗

금빛 화살, 37년을 날아 가슴에 박히다

by 이별난

지난 이야기


2권 첫 화: 선명하고 굵었던 기억들이 점점 흐려지고, 또 다른 기억이 점점 굵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2권 마지막화: 도중은 어릴 적 긴 미끄럼틀을 뛰어 내려와 바닥에 넘어지며 발목을 다쳤다.


3권 마지막화: 도중은 부모님 산소를 다녀온 후, 기다리고 있던 자훈이와 차를 탔다.



푸른 눈빛 4권

차창 밖에 많은 나무들이 보인다.


저 나무들의 씨앗이 이 땅에 자리 잡았다. 이 세상은 저 나무에게 뿌리를 내릴 한 자리를 내주었다. 그 자리에서 저마다 여러 방향으로 줄기를 뻗는다.


부모님이 심은 씨앗이 자라 여기에 서있다. 내 지금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가 뻗은 줄기의 방향과 뿌리의 끝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기억의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려, 나의 어긋난 줄기와 뿌리와 한데 묶어야 한다. 그래야 싫었던 내 모습마저 끌어안을 수 있다. 그렇게 과거의 나와 손에 손잡고 이 지구라는 회전무대를 돈다.


초등학교 4학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1988년 10월 '슈우웅 팍'


자훈이, 신우와 손에 손잡고 뛰어놀던 놀이터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뭘까?

난 그 긴 미끄럼틀을 뛰어내려 갔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했다. 마지막에 넘어지고 발목이 아펐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좋았다.


늘 많은 걸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깨고 싶었다. 그날 그걸 극복했기에 그렇게 기뻤나 보다.


그해 김수녕 선수가 쏜 금빛 화살은 금메달로 향했고,

꿈을 향한 금빛 비행을 했다.

난 현실을 잠시 벗어나고픈 욕구에 위험으로 향했고,

분노를 품은 위험한 질주를 했다.


그녀의 화살은 중심을 꿰뚫으며 '팍!' 꽂혔고,

나는 중심을 잃은 채 날아가다 땅에 '퍽!' 내팽개쳐졌다.


그때 보았던 금빛 화살의 의미가 37년을 날아

나의 가슴에 선명하고 굵게 박힌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선명하고 굵었던 기억들이 점점 흐려지고,

또 다른 기억이 점점 굵고 선명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두 개의 기억들이 연결되며 머릿속을 뒤흔들 때,

특정 기억과 감정을 도망가고 피하기만 했다.

도박을 끊고도 그런 시간이 꽤나 길었다.


그런 기억과 감정들 중 하나는,

죄책감이었다.


잠시 옆을 보았다.

37년 전, 놀이터에서 함께 놀았던 자훈이에게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8년 전, 자훈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내가 그날 불러내지만 않았어도... 바로 뛰어내려 갔었더라면...'


도박에 미쳐있던 난 그가 사고를 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를 잊으려고만 애썼고, 연락조차 안 했다.

기억은 멀리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그때의 감정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그저 가끔 생각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 6년 만에 그가 찾아왔다. 그날, 그의 불편해진 왼다리를 보았다. 그 순간 상상할 수 없던 큰 죄책감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무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자훈이는 오히려 그 무게를 들어주었다.


오늘도 자훈이는

여전히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이 무게를 아는지,

함께 들어주었다.


아무리 피하려 하고, 아무리 잊으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무게는 외면할수록 더 무거워진다.

이걸 놓치면 난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그 엄청난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들을 정면으로 부딪혀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다.


분명히 내가 놓치고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기억도 안나는 어느 곳에 있다.

그 어두컴컴한 곳 구석구석을 찾아가야 한다.

이곳이 내가 겨냥하고 날아가야 할,

인생의 목표 과녁 중 하나이다.


그 어두운 곳의 기억들은

금빛 화살이 과녁에 '슈우웅 팍'_ 박히듯,

희망에 닿는 기억은 거의 없을 것만 같다.

아무리 좋은 걸 기억하려 해도

대부분은 '슈우웅 퍽'_

그날 미끄럼틀에서처럼 고꾸라진 감정들뿐일 것이다.

그래도, 난 '슈우웅'_날아가야 한다.


인생의 중간마다,

내가 탔던 미끄럼틀을 거슬러 타고 가야 한다.

단순히 도박하나로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씨앗이 자라고, 발아가 되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뻗고, 광합성을 어떻게 했는지,

이와 유사한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여기 서있는 것이다.


그 기억과 감정의 끝에서 예상치 못한 고통을 마주친다 해도, 절대 피하면 안 된다.


어쩌면, 회복이라는 것은 고통의 끝을 마주 보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결과일지 모른다.


난 아직도 도박중독이 치료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생은 ‘나’라는 한 그루 나무가 존재를 회복하고 치유해 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1988년 10월 '슈우웅 퍽'


이 긴 미끄럼틀을 한 놈은 슈퍼맨처럼 타고, 한 놈은 뛰어내려오다가 고꾸라졌다. 신우와 나는 놀이터 흙바닥에 앉아 다치고도 웃고 있었다. 자훈이는 그런 우리에게 말했다.


" 다 작작 좀 해라."


"하하하."


"이제 일어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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