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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기억의 뿌리

150km 강속구, 마음에 박힌 점들이 씨앗 되어 숨는다

by 이별난

자훈이가 부축을 해줬다.


"자훈아, 근데 진짜 재밌었어. 너도 나중에 한 번 해봐. 신우 너도 꼭 해보고."


"어, 형. 진짜 재밌어 보이더라. 나 나중에 꼭 할 거야."


"그러다 다리 부러져봐야 정신 차리지. 내 다리 망가지면, 네가 나 평생 업고 다닐래?"


"당연하지. 네가 이렇게 부축해 주는 것처럼, 내가 네 다리가 되어줄게. 오른 다리? 왼 다리? 하하하."


"자기 몸 하나 못 챙기면서. 참나, 말이나 못 하면... 다 왔다. 들어가."


"고마워. 내일 봐. 신우도 잘 가. 얼른 나아서 또 타러 가자."


"어, 도중이 형. 우리 빨리 낫자. 하하"


기쁨도 잠시, 청록색 철제 대문 앞에 도착했다. 우리 집 대문이다. 늘 이 문 앞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있다.


네 마리 사자


안쪽에 두 마리, 바깥쪽에 두 마리

사자얼굴이 철문에 박혀 튀어나와 있다.


안쪽 사자는

항상 집을 기뻐서 뛰쳐나가는 내 마음처럼,

날 반갑게 맞아주며 웃고 있는 듯 보인다.


바깥쪽 사자는

늘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내 마음처럼,

두렵고 무서워하며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큰 양면 거울 같은 대문,

그 안팎에 비친 사자얼굴이 마음처럼 보인다


이 문을 경계로 내 세상은 바뀐다.


변치 않는 건,

세상이 어두워지면,

때가 없다는 것이다.


난 오늘도 이 문 턱을 어김없이 넘는다.


이번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한

삼성라이온즈 팀의 마스코트-사자-처럼,

내일은 이 바깥 사자얼굴이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번 이 네 마리 사자는

팀을 나눠 대문을 차지하기 위한 영역 싸움을 한다.

한국의 이 작은 동네에서 내게 벌어지고 있는

이 대문 시리즈는 대체 몇 차전까지 가야 하는 걸까?

내일은 내(內) 사자들이 힘내서 우승했으면 좋겠다.


나의 안쪽 사자들아, 우리 함께 힘내자!


1988년 10월 한국시리즈 1차전

'슈우웅 팍'

'1차전 선발 선동열 선수 대단하네요. 150km 강속구에 빙그레 타자들 속수무책입니다.'


"그렇지. 삼진 아웃"


"다녀왔습니다."


"지금 몇 시야? 오늘은 약속 지켰네."


"으, 응"


형은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선동열 선수의 삼진 퍼레이드 쇼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 덕분에 다행히 내가 발목 다친 걸 눈치 못 챘다. 알면 다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거짓말하면 난 맞는다. 그렇다고 미끄럼틀을 뛰어내려왔다고 해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땐 대충 씻고 빨리 자거나, 같은 공간에서 숨 쉬지 않는 것이 좋다. 얼른 형의 곁을 떠나려는데, 잠시 tv에 시선이 멈췄다.


"야, 라면 먹을래?"


선동열 선수는 상대 타자들에게 벽 같아 보였다. 그래도 빙그레 선수들은 그 벽을 깨려고, 온 힘을 다해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자극했다.


"야, 안 들려? 먹을 거야?"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용기를 냈다.


"그런데 형은 왜 라면 끓일 때 벽을 쳐?"


"뭐라고?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대답이나 해!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하는 거야? 야! 먹을 거냐고?"


"... 어, 어. 안 먹을게."


괜한 용기 냈다가 오히려 혼날 뻔했다. 난 형이랑 한 밥상에서 잘 안 먹는 편이다. 언젠가, '쩝쩝' 소리를 조금 냈다고 맞은 후부터였다. 차라리 배고픈 게 낫다. 그 순간, 형이 부엌을 가면서 말했다.


"엄마 지켜야 하니까. 아빠가 술 먹고 엄마 괴롭히면 때려서라도 막으려고. 힘이 없으면 아빠 못 막어."


난 옷을 갈아입는데 이런 궁금증이 처음 생겼다.

그럼 날 때리는 것도, 결국 엄마 지키려는 이유였던 거야?

나를 상대로 주먹을 단련하는 것이 벽보다 안 아프니까?


아빠를 상대하기 위한 연습상대로 내가 벽보다 나았던 거였다. 단 하나, 벽보다 내가 형을 거슬리게 하는 건 난 아프다고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은 나를 벽처럼 숨소리도 못 내게 만들어왔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아빠와 술 때문인 거였다. 형의 인간 샌드백이 된 이유는 다 아빠 때문이다.


난 그저,

우리 집에서

'빙그레'

웃고 싶을 뿐인데,

아빠 때문에 웃는 척을 해야 하는 거였다.


그 순간, 살짝 데워지는 분노를 막으려는 듯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빙그레 우리 집 라면' 냄새가 날 자극했다.

'꼬르륵' 소리가 형에게 들킬 찰나, 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도중! 그런데 너까지 그러면 안돼. 너 역할은 엄마 감싸주고 위로하는 거야. 너 저번처럼 또 나서면 맞는다."


이 소리에 맛있게 맡고 있던 스프의 향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오면,

내가 먹고 싶은 라면을 상상 속에 그린다.

1988년 10월 우리 집이 ~라면


천국이_라면,

행복이_라면,

화목이_라면...


그러나 언제나 이 향은 오래가지 않는다.

현실 속 마음이 끓이는 라면은


내 형이, 내 아빠가

아니, 라면이다.


마음에 들끓는 이 라면이 풍기는 냄새는,

불안, 초조, 공포, 두려움, 원망이 배어있는

'스~프' 냄새이다.


저 멀리 형의 주먹단련 소리까지 바람에 타고 오는데,

숨을 쉴 때마다,

'스~읍' 하고 마음에 뿌려지고, 감정들은 버무려진다.

슈우웅~'퍽! 퍽! 퍽!'


숨을 멈추면,

더 이상 이 라면을 안 먹을 수 있을까?


'꼬르륵.'

나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라면을 먹고 싶다.

아,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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