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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기억의 발아

안에서, 밖에서 이구동성

by 이별난

며칠 전

화요일


이구동성


'퍽!'


술 취한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

쓰러져 넘어지는 엄마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난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그런 나를 순식간에 감싸 안았다.

등으로 아빠를 막고, 눈으로 형을 살핀다.

늘 그렇게 아빠, 형 둘에게서 날 지키려 한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보다 형을 더 감당 못한다.

잠시 후, 형은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는 듯


세상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만!"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나도 그 순간, 함께 외쳤다.


그러나 내 소리는 세상 안에 묻힌다.

'그만!'

난 마음 속으로 소리를 삼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엄마는 왜 늘 날 보호하며 의지하고,

아빠는 왜 형 하나 못 잡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왜 말도 못 하게 하고,

울지도 못하게 하는 건데...


왜 엄마에게 착한 척만 하라는 건데.

왜 엄마 품에서 숨소리마저 참아야 하는 건데.


며칠 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후르르 쩝쩝'

형이 한국시리즈를 보면서 라면을 먹고 있다.

그 소리가 내 배에 꽂힌다.


배고파도 괜찮다. 1년 내내, 이렇게 형이 야구만 보느라 날 신경 안 썼으면 좋겠다. tv에 하루 종일 야구만 나오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그런 날이 빨리 와서, 제발 그만의 야구를 나와 함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발목도 아까보다 아프고, 배고프다.

엄마는 왜 이리 늦는 거지?


tv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잠도 안 온다.

'선동열 선수 벌써 탈삼진 8개째입니다.'

선동열 선수의 강속구는,

포수의 미트로 '슈우웅 팍' 꽂히고

형의 주먹은,

나의 몸 아무 데나 '슈우웅 퍽' 날아와 박힌다.


모든 곳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나는 형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매번 150km 이상으로 느껴지는

형의 주먹을 받아내야 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형이 우주 최강 탈삼진 왕이다.


상대 타자들은,

방망이라도 휘두르는데

난 타석 들어가 형 앞에 서면,

소리조차 낼 수 없다.


야구를 그만하고 싶다.


야구도 이번 가을 시즌, 한국시리즈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겨울이 오면,

형은 봄이 올 때까지 tv에서 야구를 못 본다.

그러면 자신만의 야구에 훈련시간을 늘릴 것이다.

자신 앞에 나를 더 세우고, 나를 더 데리고 놀려고 할 것이다.


이런 게임이 있다면 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나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싶다.


이렇게 난 오늘 하루 또 잠이 든다. 내가 겨울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두 달 후

겨울은 어김없이 왔고, 나는 오늘 수요일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설문조사

오늘은 종례시간에 귀찮은 설문조사가 있었다.


"나눠준 설문지 잘 읽고 적으면 돼."

세탁기, 자동차 보유여부
주거형태, 방의 개수
부모님 월급

'동그라미 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 창피하고, 대답하기 싫은 것들 투성이다. 이런 걸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한 가지 문항만 적고 제출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개, 형

2학년 때인가, 할머니가 동네 '해피'라는 개한테 물리신 걸 본 후였던 것 같다. 개와 형은 나에게 동급이다. 난 개 같은 형이, 형 같은 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지 않은 것은?


이 문항도 적고 싶었지만, 아빠에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쓰다 지웠다.


"차렷, 인사"


"감사합니다."


거짓말

이걸 해야 좀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다.


"반장, 나 오늘 청소 못해서 미안. 아파서 먼저 갈게."


청소분단이었다. 하지만, 난 하기 싫어서 거짓말하고 나왔다.


"도중이 형!"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는 것이 희미하게 들린다. 신우였다. 너무 코 앞까지 와서 못 본척하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어제는 학교 안 왔던데, 무슨 일 있었어? 이따가 자훈이 형이랑 학교 끝나고 놀다가기로 했는데, 형도 같이 놀 거지?"


"아니.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감기를 심하게 걸린 것 같아. 너희들끼리 놀아.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어, 알았어. 빨리 나아서 같이 놀자. 잘 쉬어."


"어, 그래"


난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집으로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교문을 나왔다. 이제 사람들이 드문 장소다. 이제 내 기분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


난 요즈음 1주일에 한 번 이상 결석을 하고 있다. 오늘은 수요일이라 4교시만 해서, 학교에 무조건 가는 날이었다. 어제는 결석했는데, 선생님은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다. 예상대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결석이 게임처럼 재미있어진다.

이 게임의 공략법도 나름대로 생겼다.


게다가 올 겨울, 야구선수들이 전지훈련을 갈 때,

형도 같이 따라간 것처럼, 내 곁에 없는 듯 조용하다.

형이 나를 안 찾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나도 그동안 나름 배고픔을 참으며,

형에 대한 공략법을 더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형에게 맞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

참 살 만한 겨울을 처음 맞는 것 같다.


난 아무도 없는 골목에 들어서자 맘껏 웃으며 집으로 달렸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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