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환상(喚想)의 세계로

13년만에 디즈니월드에 방문하다

by 루카

13년 전이었다. 부모님 손을 잡고 미국에 처음 입국한 이후로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게만 느껴졌던, 디즈니월드를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캐릭터들과 사진을 찍으며 해맑게 웃던 열한 살의 철부지 소년은 세월이 지나 스물넷 대학생이 되어 다시 미국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어린 나는 몰랐지만, 환상의 세계에 들어서는 데는 비싼 대가가 필요했다. 미국 물가를 감당해야 했던 부모님의 어깨 위 무게를 이제는 내가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말은 5달러짜리 햄버거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나의 현실이었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부모님의 걱정과 잔소리는 나의 자격지심을 건드려, 결국 원망 섞인 짜증으로 되돌아갔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서러운 밤들이 쌓여갔다. 내 모습이 미워서 부모님에게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싶은 나날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차마 미국에서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디즈니월드의 인턴십 본부에 외근을 다녀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디즈니월드 무료입장권을 선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놀이공원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날 아침, 하필이면 감기 몸살에 걸린 탓에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온몸과 뼈마디가 쑤셨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침대에 누워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화면 가득 불꽃놀이 사진이 터져 나왔다. 독립기념일이라고 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티들을 보며, 왜 나만 이 황홀경 밖에 있는지 억울했다. 짜증이 몰려오는 바람에 이불을 격하게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하려 했지만, 문득 서랍에 있던 디즈니월드 무료입장권이 생각났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고, 휴대전화 화면 속 빛의 파편들이 남긴 잔상이 나를 재촉했다. 그제야 나는 이불을 걷어찼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디즈니월드에 도착하였다.


13년 만이었다.


놀이기구를 탈 생각은 없었다. 아픈 몸으로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13년 전 놓쳤던 그 불꽃놀이를 기어코 내 눈에 담는 것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매직 킹덤 입구로 향하는 유람선에 올랐다. 13년 전, 부모님 손을 잡고 탔을 바로 그 배였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여덟 살 남동생은 졸린다며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떼를 썼었다. 그때의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동생을 노려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억울했던 감정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주위를 둘러보며 유람선 갑판을 한 바퀴 돌았다. 짜증 내는 꼬마, 문신을 한 부모님, 불꽃놀이를 기대하는 꼬마의 누나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서 눈물을 삼키던 열한 살의 나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는 손잡아 줄 부모님도, 원망할 동생도 없었다. 가족이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혼자 남겨진 지금, 자유로움과 나의 무모한 선택들로 인한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한 카타르시스가 조금씩 나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깜깜한 호수 위로 다시 근래의 아픈 기억들이 느닷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풍경 앞에서, 총기 난사로 폐쇄되었던 교정, 아빠의 병원 입원 소식을 전하던 엄마의 연락, 돈이 없어 5달러짜리 햄버거로 하루를 버텼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더 멋진 어른이 되어 돌아오겠다던 다짐은, 통장 잔고 조차 무서워서 확인하지 못하는 초라한 청년의 고달픈 삶 앞에서 무너져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난간에 기댔다. 나는 환상(幻想)을 쫓아온 걸까, 환상(喚想)에 이끌려 온 걸까.


유람선에서 내려 마법의 성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13년 전과 똑같은 노란 조명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때 내 눈을 사로잡았던 라이언 킹의 심바 인형과 달콤한 팝콘 냄새는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인파가 광장으로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다. 불꽃놀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윽고 광장의 조명이 꺼지고, 익숙한 디즈니 영화의 서곡과 함께 첫 번째 불꽃이 밤하늘을 갈랐다. 사람들의 탄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이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에 바로 휴대전화으로 그 황홀경에 카메라 렌즈를 겨눴지만, 금세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문득, 과거에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사진작가가 설표를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이 순간에 머물고 싶어.’ 그 대사가 어릴 적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서야 그 뜻이 이해되는 듯하였다. 좋아하는 영화들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며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는 광경을 보며, 과거에 해맑게 놀이공원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스쳐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되었다. 돌아오지 못할 과거를 부르는 환상(喚想)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의 내가 오롯이 마주한, 평생 이를 수 없을 환상(幻想)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 모든 감정이 전부 얽혀있었을 것이다.


그날의 불꽃놀이가 내 인생을 전부 바꿔놓았다는 진부한 결론으로 13년 만의 나의 디즈니월드 방문기를 마무리하지는 않겠다. 택시 창밖으로 멀어져만 가는 놀이공원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불꽃놀이 쇼는 내 우울증을 치료하지도, 텅 빈 지갑을 채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기숙사로 돌아가더라도 삶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없었다. 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다시 5달러짜리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해맑아 보이면서도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짓곤 하는 무급 인턴이었으니.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잠들어버린 후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나는, 밤하늘로 사라져가는 불꽃을 바라보며, 열한 살의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외쳤던 그 말을, 스물넷의 나의 모습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더 멋진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