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지독하게

카멜 다우드_후리_민음사

by 박진권

처절하게,

지독하게



《후리》



카멜 다우드



민음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 무엇을 믿어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사이비, 이단, 설령 악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종교는 권장이 아닌 필수다. 아직도 히잡을 강요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여성을 인격이 아닌 사물로 인식한다. 특히 독자적으로 해석한 쿠란이라는 글은 나는 성경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천국에서 의인에게 ‘주어지는 처녀’를 후리라고 한다. 여기서 여성이라는 인격체는 성적 자기 선택이 없고, 마치 사물처럼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은 날 때부터 천국과 밤을 제외하면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곳엔 누구나 누려야만 하는 자유ˡᶦᵇᵉʳᵗʸ가 없다.


1993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국가 위기 상황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문에, 집이 휘청인 것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이렇다고 할 엄청난 위험을 겪진 못했다. 그래서 전쟁의 참상과 침략, 수탈, 약탈 등 역사적인 큰 줄기를 글로 읽고 사진으로 접한 게 전부다. 요즘 러·우 전쟁으로 죽어가는 젊은 넋을 유튜브 쇼츠로 보며 안타까움과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긴 하지만, 결국 다음 쇼츠를 보며 그 거대한 슬픔을 몇 초 만에 잊는다. 내게 일어나지 않은 안타까운 감정은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애초에 공감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편이라 멀리서 무표정하게 관조할 뿐이다. 그저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읊조릴 뿐이다. 때문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커트 보니것ᴷᵘʳᵗ ⱽᵒⁿⁿᵉᵍᵘᵗ ᴶʳ의 《제5도살장ˢˡᵃᵘᵍʰᵗᵉʳʰᵒᵘˢᵉ⁻ᶠᶦᵛᵉ》 등 관련 도서를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점점 사라지는 인류애를 붙잡고,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카멜 다우드의 소설 후리에서는 목소리를 잃은 피해자와 방관하는 지식인 그리고 여전히 존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해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소설을 통해 어쩐지 대한민국의 100년이 떠오르고 한숨이 나오는 것은 괜한 착각일까?


···


전쟁 피해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난제가 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다. 그 피해자의 목록에 남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카테고리에 묶여 포괄적으로 봤을 때 남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직접적 희생자는 남자이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20~30대의 젊은 넋이다. 이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현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통계’가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오랜 시간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이것에 대한 통계는 잘 나와 있지 않아 적절하게 보상받기 어렵다. 노인은 전쟁에서 쓸모가 없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회적 가치가 희박하다. 그래서 여기 치이고 저기 치여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전쟁의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인가? 모두가 피해자다. 더 상세히 말하면, 정신 나간 권력자들이 가해자고,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국민은 전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나서서 전쟁을 권장하는 국민은 없다. 강제로 희생된다는 관점에서 피해자를 남과 여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현대의 대한민국엔 히잡도, 쿠란도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것을 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로 발전적이지 않다. 대한민국은 알제리가 아니다. 누가 더 고통스럽고, 누가 더 힘드냐는 논제로 몇 년째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후리를 읽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피해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전쟁의 잔혹성이다. 그 참상으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정부가 행한 은폐와 군부 독재의 위험성을 다시금 상기하고,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 독재가 나오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같은 국민을, 서로를 혐오하는 것은 정답이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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