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번외편, 지금의 기록 속에서 문득 떠오른 그때의 다짐
요즘 나는 ‘지금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매일 쌓이는 공문과 회의록, 교섭 일지, 일상의 메모들 속에서
문득, 오래된 한 문서가 떠올랐다.
2022년 9월 12일, 유진기업 노동조합 투쟁노선.
노동조합이 막 만들어졌던 그때,
우리는 싸움보다 방향을 먼저 정했다.
“어떤 노조가 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투쟁노선 속에 담겨 있었다.
지금 다시 그 문서를 꺼내 본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다짐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 초심을 얼마나 지켜내고 있을까?
1. 회사의 발전이 곧 본인의 발전이 될 수 있는 노동환경을 구축한다.
‘회사의 매출규모가 커지고 수익이 개선되면 노동자 개인이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존 회사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되, 그간 회사의 발전이 먼저였다면 이제는 본인의 발전이 선행되어 다시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노동환경을 구축한다. 직급 및 급여체계의 일부 수정과 각종 수당 보장, 쾌적한 노동환경 조성을 원칙으로 하고, 개선된 제도가 전 직군에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조율한다.
▶ 지금의 생각
회사의 수익이 커질 때 보상은 여전히 부족했고,
수익이 줄어들자 이번엔 ‘권리수호’보다 ‘회사생존’을 내세우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버텼다.
단체협약으로 최소한의 제도적 틀은 세웠지만
지금 우리의 싸움은 권리를 쟁취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버팀에 가깝다.
버티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를 지켰고 그 연대가 바로 우리 노동조합의 진짜 힘이었다.
2. 건설현장과 레미콘운송사업자들로부터 조합원을 보호한다.
건설현장 및 건설사의 부당요구에 대해 노동조합 차원의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권역대표위원 제도를 통해 현장 대응과 공문, 법적 조치를 병행한다. 운송사업자들의 폭언·위협·영업방해 행위에는 양보 없는 대응을 실시하며 부당행위가 근절될 때까지 투쟁을 이어간다.
▶ 지금의 생각
현장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부당요구는 더 교묘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서 참는 노동자’가 아니라 ‘함께 대응하는 노동조합’이 있다.
우리는 조합원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 제도적 장치를 하나씩 준비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운송사업자와의 갈등도 차근차근 풀어나가며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들에게 다시 알릴 계획이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우리가 현장을 바꾸는 또 하나의 투쟁이다.
3. 비현실적 처우와 부당한 노동지시, 부당해고, 인사상 불이익을 방지한다.
▶ 지금의 생각
이 조항이 가장 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이 원칙을 지키려다 해고됐고 그 해고는 지금도 법정에 서 있다.
아직 복직명령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이 조항이 왜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깊이 배웠다.
우리가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었다.
4. 소통과 합리적 사고로 회사와 상생하는 모델을 만든다.
조합원 전체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구축하고 모든 의견을 투명하게 공유하며 합리적 사고를 노동조합의 기본정신으로 둔다. 외부세력의 도움 없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노조로서 회사와 상생할 수 있는 모범적인 모델을 만든다.
▶ 지금의 생각
그때는 ‘자율적 노동조합’이라는 말이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우리의 생존전략이 되었다.
우리는 한때 ‘외부의 도움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수많은 연대의 손길이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간간히 고립된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한 건 연대의 힘이었다.
‘외부세력’이라는 표현은 오만이었다.
연대 없는 자율노조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투쟁의 시간을 지나오며 절실히 배웠다.
진정한 자율성은 고립이 아니라 연대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내부의 연대로 무너지지 않았고 외부의 연대로 세상이 우리를 잊지 않게 했다.
그 두 힘이 만나 지금의 유진기업 노동조합을 지탱하고 있다.
5. 비난이 아닌 대안과 결과로 싸운다.
경영진을 무조건 비난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고 결과로 설득한다.
우리의 요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나 합리적 사고와 실천으로 투쟁한다.
▶ 지금의 생각
솔직히 말하면 수없이 내놓은 대안이 거절로 돌아올 때면 심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비난의 욕구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조금 다르다.
회사를 향해 다시 ‘대화’로 시작하는 법,
그리고 서로 대안과 결과가 남는 협의를 만드는 법을 서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더 이상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내세우지 않고
우리 역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간다면
그때는 진정한 상생의 교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연대로 버틴시간
세월이 흘렀지만, 이 문서의 문장들은 낡지 않았다.
단지 더 구체적이고, 더 현실적이 되었다.
그때의 우리는 초심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연대로 버텨왔다.
내부의 연대가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했고
외부의 연대가 세상이 우리를 잊지 않게 했다.
이 두 힘이 합쳐져, 결국 오늘의 노동조합을 지탱하고 있다.
초심은 잊은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드는 것이다.
유진기업 노동조합의 투쟁노선은 과거의 선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우리의 나침반이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문장을 붙잡고 있다.
회사의 발전이 곧 노동자의 존중으로 이어지는 그날까지.
이 기록은 노동존중사회를 위한 노동자의 기록이며, 모든 연대를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