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의 서문
일에서 불행하면
인생 전체가 불행하기 쉬운 구조에 살고 있다.
공무원으로 40여 년을 근속하고 정년퇴직한 남편을 둔 엄마는 수시로 꿀렁대는 딸의 인생을 보며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편한 길 놔두고 고단해 보이는 길로만 가는 딸이 안쓰러워 보이지만 대학원까지 나온 똑똑한 딸(부모님 눈에는 자식은 언제나 최고로 멋지다!)이니 저 좋아하는 일 하다가 제자리로 곧 돌아올 거라 기대하셨으리라.
그러나 나는 호기심이 많은 자유 영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즐겁게 지낼 수 있더라도 저기 어딘가에 사람들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삶은 전반적으로 분주하고 산만했다. 모색하고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광고 기획자에서 공연 기획자로, 공연 기획자에서 축제 마케터로, 축제 마케터에서 늦깎이 대학원생으로, 대학원생에서 공공 기관 직원으로, 공공 기관 직원에서 공무원으로, 공무원에서 자영업자로. 열 개의 직장, 평균 근무 기간 2.5년. 직업 환승으로 만들어 낸 숫자다. 물론 환승의 원칙은 있었다. 현재의 나에게 없는 일 근육을 향상할 수 있고 문화 예술 분야에서의 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알아서 문화 예술계에서 순환 보직을 한 셈이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만났던 많은 사람으로부터 숱하게 받았던 질문이 “대체 왜?”였다. 광고 대행사를 그만두고 공연 기획사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도, 직장 다니다가 뒤늦게 전업 학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공공 기관의 정규직 팀장 자리를 박차고 계약직 공무원으로의 전직을 위해 면접을 볼 때도 심사위원들은 안정적인 자리를 마다하고 불안정한-계약 기간이 끝나면 일자리를 찾는 번거로운 수고를 해야 하는- 이 직을 굳이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셨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준비한 대로 답을 하기는 했으나 설명이 부족했는지 여전히 의아하고 신기하게 쳐다보셨던 기억이 난다.
이직은 자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회사가 거부한 적도 있다. 거절은 언제나 쓰다. 경험이 저장고에 차곡차곡 쌓여 인생의 고비를 마주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인생의 무기가 될 거라 믿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평생직장’과 ‘정년(停年)’이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어도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다.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을 거라거나,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성격일 거라든가, 욕망이 많아 한 곳에 정착하기 힘들 거라든가. 오죽하면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건 좋은데 내 자식이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싫다고 하신 적도 있다.
선택의 순간에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있을 것 같지만 결정할 때 막상 작동하는 건 직관이다. 진짜 중요한 결정은 의외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 보는 거. 그냥 좋아서, 그냥 재밌을 것 같아 결정한다. 일단 해 볼 때까지 해 보지만 안 되면 할 수 없다. 대상에 대해 적당한 거리와 여지를 둘 줄 아는 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할 만큼 하되 결과는 연연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
선택지들이 가져다줄 손익을 이리저리 따져보고 합리적으로 결정했다고 자부하겠지만 인간이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에 비합리적인데 합리적인 선택이 나올 리 없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올 리가 없지 않나. 선택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결과가 나오기 위해 그만큼의 액션이 필요하다. 성실의 미덕을 발휘해 가다 보면 될 일은 된다. 예상치 못한 대로 흘러간 대도 멈춘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가다 보면 닿게 되어 있다.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다. 그건 내게 주어진 떡이 아니다. 이제 그냥 편히 보내주자. ‘아님 말고’다.
‘아님 말고’는 사람과도 일에도 인생사 어디에도 활용 가능한 만능 치트 키(cheat key)인 걸 알지만 몸과 마음에 장착하기는 쉽지 않다. 고수(高手, master)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수련과 훈련이 필요하듯 자기 비하와 자존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고수가 되기 위해 그냥 노력해 보는 것이다. 고수의 끝판은 없다. 이 판 깨면 다음 판 가서 또 깨고.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밥벌이를 시작하고 보니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 보내고 있었다. 일에서 불행하면 인생 전체가 불행하기 쉬운 구조였다. ‘아님 말고’의 정신과 태도가 어느 곳보다 필요한 곳이 일터였다. 인생 모토가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기’다 보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절실했다. 의미 있게 산다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살기는 달랐다.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하면 “그럴 수 있으면 축복이죠”라는 응원을 보내면서도 ‘언제까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있을지’라는 걱정과 우려의 눈빛을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재미의 핵심은 즐거움이다. 극상의 유쾌함. 그러나 재미는 어른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특권이자 몫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느라 내키지 않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내심이 더 중요했다. 어른에게 재미는 사치였다. 감당해야 할 많은 의무를 욕망보다 우선하다 보면 재미 따위를 추구할 여력은 없다. 하지만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진짜 그럴까? 직접 가 보지 않고는 진실을 모르지 않을까?’라는 반항심과 호기심이 들어서 ‘재미있게 살기’가 포기가 안 됐다.
내게 재미는 감동이다. 감동받은 사람을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고 감동을 만들어 내는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감동(感動)’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도 뜻과 소리가 예쁜데, 영어로도 그럴듯해서 영어식 표기의 ‘감동’도 좋아한다. 영어로 ‘마음을 뭉클해지게 하다’가 ‘Move’인데, 마음을 무브, 즉 움직이게 하는 게 ‘감동’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인데, 어떤 계기를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은 꽤 근사하고 멋진 일이었다.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개체로 문화 예술만 한 게 없다.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보였다.
이제 겨우 말을 시작한 어린 조카에게 주입하듯 말했던 단어가 ‘만고 땡’이다. 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이보다 더 의미를 ‘적확하게’ 표현할 다른 단어를 못 찾았다. 진지하면서도 나풀나풀 가볍게 만고 땡으로 지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디서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 일하는 데도 정답이 없다. 인생도, 일도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이 책은 ‘아님 말고’와 ‘만고 땡’의 정신으로 나의 쓸모와 재미를 기준으로 좌충우돌 업을 이어 오며 터득한 즐겁게 일하는 법에 대해 썼다. 직장을 박차고 나오라거나 N잡러가 되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자기 앞의 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누구도 대신해서 살아 주지 못한다. 자기 갈 길은 누구보다 자기가 더 잘 안다. 이렇게 사는 삶도 있다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눠 보고 싶었다.
생각대로 일이든 인생이든 풀리지 않을 때 했던 건 산책과 양치질이다. 조금이라도 걷고 나서 앞으로 나아갈 기운을 얻게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접한 뒤로 혼자도 걸어보고 책상에 앉아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동료, 선후배를 데리고 나가 같이 걸었다. 걷다 보면 뭐든 다시 해 볼 힘이 났다. 미리 좀 걸어 봐서 익숙한 길을 함께 나와 산책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 주시면 좋겠다. 산책하시고 뇌와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다시 ‘으쌰!’ 하는 힘을 내어 보는 순간을 맞게 되시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2021 겨울, 임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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