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덴카 바도비나츠, 민주적 미술관에 대한 일곱 개의 요점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탈사회주의(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위치한 지역) 세계의 미술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그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이 있지만 그중 아마도 가장 상투적인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는 민주주의가 결여되어 있고 민주적 기관이 전무하다는 편견일 것이라 말한다. 즈덴카 바도비나츠가 바라보는 민주적 미술관에 대한 시각은 오늘날의 여러 위기 상황뿐만 아니라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 사회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류블랴나 미술관(Moderna galerija)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민주적 미술관에 대한 일곱 개의 요점을 정리한다.
1. 민주적 미술관은 포스트모던적 복수성이라는 미명 아래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정확한 입장 표명을 한다.
2. 민주적 미술관은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기에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입장들과 연관되기 때문에 민주적이다.
3. 민주적 미술관은 새로운 복잡성을 만들어 내는 병렬 서사의 장이다.
4. 민주적 미술관은 합의의 공간이 아니라, 간섭의 공간이다.
5. 민주적 미술관은 국제 무대에서 동등한 대화 및 파트너십이 구축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새로운 국제주의를 탄생시킨다.
6. 민주적 미술관은 개정 미술관이다.
7. 민주적 미술관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현존하는 다양한 서술자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Q. 미술관, 무엇을 대변해야 하는가?
슬로베니아의 주요 공공기관 중 하나인 근대미술관은 슬로베니아 사회 전반을 대변할 것을 요구 받는다. 사회의 전통적인 구성원들은 '사회 전반'을 국가, 슬로베니아 국민,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가장 유명한 작가들을 칭하는 것을 이해하는 반면 좀 더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은 미술관이 진정으로 민주적이어야 하며 사회의 다양한 입장, 특히나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는 와중에 신자유주의자들은 미술관이 우아하고 화려한 도회적인 모임을 위한 장이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세계적인 스타를 선보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입장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를 시도했다가는 다양성의 조각보만을 키워낼 뿐이다.
Q. 주류 미술관, 비평적 미술관
즈벤나 바도비나츠는 다양한 취향과 기대치를 충족시기 위해 노력하는 미술관을 '주류 미술관'으로, 미술관의 이해도를 보다 근본적으로 깊이 있게 변화시키는 데 뜻을 두는 미술관을 '비평적 미술관'으로 칭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비평적 미술관은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상품화 및 다양한 사회적 영역의 균질화에 대항하고자 한다. 한편 주류 미술관은 미술관 산업에 가능한 많은 소비자를 유치하기 위해 민주화를 천명한다.
미술관의 민주화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미술관 산업이 발달된 곳에서 미술관의 민주화란 주로 '모두를 위한 무언가'라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부합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미술관인 비평적 미술관은 특정 종류의 미술을 그저 전시할 뿐 아니라, 그 전시와 소장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이야기의 근거와 영향을 정확히 표명한다. 비평적 미술관은 다양한 지역의 역사 간의 위계질서를 폭로한다.
Q. 서사의 복수성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근대미술관과 현대미술관 간의 구분이 20세기와 21세기처럼 시간의 경계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 현대간의 개념적 구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와 개발을 향한 노력인지 탈식민지화를 옹호하는 노력인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 미술관 모두 꾸준히 과거를 재규정하고자 노력하며, 단일의 서사를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복수의 서사에 의해서만 학습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서사의 복수성이 민주적 미술관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Q. 미술 아카이브
그리고 이러한 복수성을 생산하는 데 주요한 도구가 미술 아카이브다.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메텔코바 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전시에 아카이브가 자주 포함돼 역사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예로 든 사례는 <동쪽 미술 지도 : 현대 미술과 동유렵>이라는 저서, 영상 기록물, 국적이라는 틀을 제거한 미술가들의 다이어그램과 방송국에서 미술 영상을 소개하고 현대미술에 대해 보도하는 <TV 갤러리>, 펑크 록계의 주요 인사들이 대중과 함께 꾸린 프로젝트 <펑크 박물관> 등을 예로 든다.
Q. 도난당한 전시, <소셜드레스 : 권력을 대중에게>
미술관은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대변하지 않는, 즉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발언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미술관은 구체적인 상호 간섭을 통해 해석과 번역이 도출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해 내야 한다.
즈덴카 바도비나츠가 기획한 전시 <스탑오브 1:1>에는 마리아 모카 푼거카르가 기획한 <소셜드레스 : 권력을 대중에게>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으로 옮겨 오기 전, 누군가 <소셜드레스 : 권력을 대중에게> 전시 전체를 훔쳐 가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전시는 작가가 무직 여성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쳤던 워크숍에서 생산된 옷가지와 부품들로 구성됐었다. 그리고 워크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작품에 슬로베니아에서 일어난 대구모 시위에 사용된 구호를 수놓았다. 전시를 훔친 복면객들은 전시장 바닥에 반대의 메시지를 적으며 정치적 퍼포먼스라 설명했다.
Q. 정말 도난당한 것은 무엇인가?
푼거카르의 작품을 선보일 수 없게 된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도난당한 작품에 대한 기록물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도난당한 것은 <소셜드레스> 작품의 작은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다. <소셜드레스>의 주요한 핵심은 그 참여적 성격에 있고, 물리적 구성체계가 와해되었다고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원 차원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절도자들의 정치적 퍼포먼스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명확한 입장을 취하게끔 새로운 대화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Q. 엘인터내셔날레
류블라나 근대미술관은 엘인터내셔날레(L'Internationale)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이래 엘인터내셔날레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라니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벨기에의 엔트워프 현대미술관, 터키 이스탄불 및 앙카라의 SALT,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판아베 미술관, 그리고 바르샤바 근대미술관 등을 아우르는 초국가적 연합으로 성장했다.
상기 일곱개의 미술관은 공통의 비전과 이익을 기반으로 꾸린 개별 독립체들이다. 각 일원이 계획하는 개별 프로젝트가 있고, 각자의 소장품 및 아카이브를 둘러싼 협업이 있다. 그 결과 엘인터내셔날레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지위, 다양한 분야의 문화 기관과 연대하며 점점 더 많은 지평의 동맹을 만들어 가고 있다.
Q. 개정 미술관이란 공동의 지식을 생산하는 장이다.
엘인터내셔날레에서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수평적 협업에 대해 논한다. 이는 전문가 및 작가 간의 협업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지식 생산 과정에 대중을 적극적인 행위자로 편입시킴을 의미힌다. 그는 엘인터내셔날레에서 초국가적 미술관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고, 이를 개정 미술관(constituent museum)이라고 칭했다. 엘인터내셔날레 내의 미술관들은 그저 세상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미술관 활동에서 수동적 대상의 위치에 있었던 다양한 지정학, 젠더, 인종, 계급의 대중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엘인터내셔날레의 구성원들은 미술관 관람객, 작가, 이론가, 학자, 활동가, 역사가, 환경 운동가 등 다양한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다. 개정 미술관이란 동등하게 맺은 관계와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그 안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대신하여 발언하지 않는다. 개정 미술관이란 공동의 지식을 생산하는 장이다.
Q. 공통의 윤리에 기반한 공동체
엘인터내셔날레의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로 <공동의 지식 용어 사전> 제작이 있다. 이는 여러 사회 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번역하는 일종의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맥락 간의 번역이 서술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 서술자는 주어진 참조 영역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용어를 제시한다. 그리고 서술자가 제시한 용어는 일종의 집단 편집 과정과도 같은 토론의 대상이 되는데, 그 과정을 거쳐 용어가 변형되거나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탈사회주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미술관이란 노력하는 미술관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걸맞는 새로운 방식의 동료애를 개발하고, 공통의 윤리에 기반한, 즉 계급, 젠더, 인종 내지 지리 정치학적 구분을 뛰어넘어 구축되는 공동체를 일구고자 노력해야 한다. 민주적 미술관은 전 지구적 연합을 도모하며 대안적 방식으로 주체성을 생산해 내는 공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