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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 사르트르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6

by 최영훈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한낱 그림자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얼마 동안 같은 땅 위에 실려 있었을 뿐이다.... 가장 권위 있는 지배자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거룩한 기생자(寄生者)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고, 자기가 겪은 추상적 폭력을 남에게 행사한다. 나는 일생동안 스스로 웃고 또 남을 웃기지 않고서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권력이라는 암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게 복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사르트르, <말>, P.24.

냉철한 회고

어린 시절의 위인전집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평전이나 자서전은 딱 두 권인데, 하나는 레이 몽크가 쓴 그 전설의 <비트겐슈타인 평전>, 다른 하나는 간디의 자서전이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은 후, 난 절대로 평전이나 자서전은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간디의 자서전은, 좀 불경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오히려 내가 갖고 있던 그의 이미지를 완전히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여하간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읽은 자서전 같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난 이 책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변광배 선생의 책을 읽은 뒤 궁금해져서 대출을 해서 읽었고, 현재는 사서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구토>도,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도 마찬가지였지만 <말>만큼은 아니었다. <말>만큼 자신의 성장기를 냉철하게 담은 책은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라면, 사르트르가 <말>에서도 얘기했듯이, 아이의, 이수지의 표현을 빌리면, 위인적인 “모멘텀”이 가득하거나 가난한 시절이나 학대에 대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고통으로 눌러쓴 문장의 행간마다 자기 연민이 차고 넘치거나, 또는 자신에게 “선한 영향력”(참고로 난 이 표현을 혐오한다.)을 행사한 부모나 이웃, 친지, 스승, 동료와 연인에 대한 뒤늦은 감사와 찬사의 나열로 점철된 것이 대부분이다. <말>에는 이 모든 것이 없다. 어린 시절, 불과 몇 년에 대한 기억과 그 기록이지만, 그 안엔 그런 것이 없다. 대신 그 이후의 삶, 성인이 된 이후 그가 쌓아 올린 철학과 문학, 그 세계의 뿌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P.67.
“오늘날에도 나는 비트겐슈타인보다는 추리소설 시리즈를 더 즐겨 읽는다.”, P.85.
“자기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어떻게 연극을 할 수 있겠는가?”, P.92
"나의 존재는 단단하지도 한결같지도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한 일을 장차 계승할 자도 아니었고, 강철 생산에 필요한 자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는 혼이 없는 존재였다.”P.97

역할, 놀이

이 책의 전반부, 즉 ‘읽기’의 주 내용은 연기와 읽기다. 앞서 쓴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사르트르는 얹혀살기 시작한 외가에서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 착하고 예쁜 아들이자 손자, 명석하고 재치 있고 천재적인 손자의 상(想)을 만들어 놓고 이에 충실한 “연기”를 수행했다. 그는 그것의 완벽한 실행을 보람으로 여겼다. 어쩌면 존재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모두가 그랬다. <구토>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처럼 다들 걸맞음을 연기했다. 계급제나 신분제의 탑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와 같은 그 모든 이즘과 그 이즘들의 분파들이 곳곳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참전은 명예였으며 신과 조국과 왕을 위한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전 세기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대로 살거나 그 흔적들을 더듬어 가면서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 포와로 시리즈 곳곳에 이런 변화와 유지, 계승과 전복의 혼란이 담겨 있다.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종교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그다음은 사교 모임이고 정치적 행사며 그다음은 구별되어지는 것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어린 사르트르는 그런 세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할, 흔들림 없는 자리를 차지할 방법을 알아냈던 것이고, 그 결과 그렇게 충실하게 연기했던 것이다.


“동네의 영화관들이 아무라 마구 입장시켜서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이 새로운 예술이 모든 사람의 것이자 동시에 내 것임을 알았다. 우리는 정신 연령이 같았다. 나는 일곱 살이지만 읽을 줄을 알았고, 영화는 열두 살이지만 아직 말할 줄을 몰랐다. 그것이 이제 시작이어서 앞으로 많은 진보를 하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P134
"믿음이란 그것이 아무리 깊어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지탱해야 하고 적어도 그것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P.233


환상, 탈출

대중소설의 시대였다. 쥘 베른의 전성기였고 미국에선 카우보이 소설이 수입 됐으며 유럽에서 첩보원과 모험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유행했다. 뒤를 이어 영화의 시대도 열렸다. 책의 후반부, ‘쓰기’에서는 대중소설을,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가는 소년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그 결과, 전반부에서는 혼자서 상상만 하며 연극처럼, 유럽의 기사 이야기들을 연기하여 연극 놀이를 했던 소년은 그 대중소설을 직접 써보기로 한다. 물론, 그의 고백처럼, 그 소설들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약간 가져와 짜깁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썼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잠시 후, 그는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가서, 그는 정규 교육과 또래와의 어울림과 친구의 죽음 등 을 경험한다. 쓰기는 잠시 뒷전으로 밀린다. 유럽이 종교와 왕권과 명예를 앞세운 전쟁의 시대에서 식민지와 민족과 정복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쟁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그가 쓰는 소설 또한 마냥 상상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영화관이 신분과 계급의 학교와 친구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P.184.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PP.270~271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원(赤手空拳)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P.272

자기, 구원

역할과 환상에서 걸어 나온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구토>는 서른에 썼다. <존재와 무>는 마흔 즈음, <말>은 오십 즈음에,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1권은 그 몇 년 뒤에 세상에 내놨다. 그 사이 많은 희곡들과 소설과 비평을 썼다.


남이 바라는 “타자”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앞에 놓인 자유를 받아들인 후, 그는 줄기차게 그 길로 달려왔다. 자신의 존재의 그 토대를 계속 쌓으면서 살아왔다. 물론, 그 토대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하지도, 존재의 당위성을 말하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가 한 건, 어쩌면 끝없는 구원의 실천 아니었을까.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예정된 것이 없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던지며 살아갔던 건 아닐까? 그래, 그거 아니면 무슨 이유로 살겠나.


사족...

그의 외가가, 우리가 잘 아는 슈바이처의 집안이라는 건 흥미롭다. 외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 아닌가. 그 반대쪽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눈에 보이는 대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을 사 모을 생각이다. 집에 있는,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도 몇 권 있고..... 그처럼 나 또한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해 내어 오늘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면 좋으련만. 50이 넘은 뒤에도 그 시절의 “온갖 특징”이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뭔지를 알아야 잡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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