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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주 Jun 18. 2018

우리 삶 속에 들어온 현대 예술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Cloud Gate>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 영화관에 들른 당신은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지 막막하다.


그럴 때엔 먼저 평점을 보라.


별점과 함께 센스 넘치는 리뷰가 정성스레 적혀있다. 그런데 속 시원하게 답을 내려줄 거 같던 평점이 오히려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네티즌 평점과 전문가 평점이 상이하게 다를 때이다.      



네티즌의 극찬이 무색하게 평론가가 온갖 시니컬한 단어로 물어뜯기에 바쁜 영화가 있다면, 반대로 평론가는 꿋꿋이 작품의 진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돈 버렸다는 네티즌의 하소연이 넘쳐나는 영화도 있다. 특히 “독립” 또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영화” 앞에 붙으면 이 둘의 평가는 양끝으로 치닫는다. 생면부지의 네티즌 아무개를 믿을 것인가, 영화 잡지에 글이라도 한편 기고해본 전문가를 믿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러한 고민은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반 대중이 선호하는 작품과 예술 평론가가 극찬하는 작품은 서로 괴리가 크다. 물론 영화에서도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명작, 예를 들어 "인생은 아름다워", "시네마 천국",  등등과 같은 작품에는 이견이 별로 없듯이, 예술에서도 고전 명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리지 않는다. 우리가 대가라고 부르는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대부분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예술로 갈수록 일반 대중과 미술 전문가 사이의 평가는 크게 갈린다.



이러한 현상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명화"라는 말이 있듯이, 고전 작품까지만 해도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다.  바로 "잘 그린 그림"이라는 기준이다. "잘 그린 그림"이란, 재현을 잘 한 그림이다. 원근법에 맞게 형과 색을 조화롭게 배치해 대상을 잘 표현한 작품이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는 굳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한눈에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 라파엘로나 윌리암 부게로의 작품을 보고 못 그렸다고 할 사람은 없다. 작품에 문외한이라도, 그들이 뛰어난 테크닉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성모 마리아나 아기 천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라파엘로 산치오, Madonna in the Meadow, 1506                (좌)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  The Return of Spring ,1886



그러나 현대 예술에 와서는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졌다. 더 이상 얼마나 잘 그렸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품의 심미성보다는 독창성과 같이 작품에 내재된 아이디어나 개념이 더 중요해졌다. 뒤샹 이후로 예술가는 더 이상 숙련된 기술자가 아닌,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자가 되었다. 기존의 틀을 부셔버린 혁신적인 작품의 등장으로 예술의 외연이 넓어지면서 그 개념과 평가 기준 또한 바뀌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현대 예술은 추상적이고 개념화됐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작품이 도통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고, 개념화됐다는 것은 공부하지 않으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전처럼 단순히 '잘 그렸다, 못 그렸다'라고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러한 현대 예술의 난해함 때문에 평가는 나뉘게 됐다.



(좌) 싸이 톰블리,  <Untitled>                                                 우) 바넷뉴먼, <단일성 6(Onement VI)>
제니 홀저,  <I FEEL YOU>,  2007,  San Diego



결국 우리는 평가의 간극처럼 현대 예술과 멀어지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 예술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contemporary)까지 본다면, 사실 현대 예술만큼 우리의 고민을 잘 표현한 작품도 없다.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민감한 더듬이로 현재의 문제를 파악해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현대 예술(contemporary art)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예술은 현대인과 멀어졌다.



현대인을 위한 예술이 현대인을 위한 예술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삶에서 괴리된 예술은 다시 우리의 삶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예술가의 탓으로 또는 대중의 탓으로 돌리며 잘잘못을 가릴 수는 없다. 소통하고자 하는 자를 고려하지 않는 예술가도 문제이고, 제대로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욕만 하는 대중도 문제이다. 그러나 아마 이러한 고민은 소통을 원하는 자, 예술가에게 더 절실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에게 큰 과제일 것이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하지만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는 그 고민에 대해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은 것 같다. 그는 작품성과 대중성, 이 모두를 잡았다.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Cloud Gate"는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아니쉬 카푸어,  <Cloud Gate>,  2006



이 작품은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대형 스테인리스 조형물이다. 클라우드 게이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시카고 빈(Chicago bean)”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이다. 수많은 예술 중에서 애칭을 갖고 있는 작품이 몇 개나 있는 지를 생각해보면 클라우드 게이트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를 보기 위해 밀레니엄 파크를 방문한다. 그리고 파리에 가면 반드시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듯이,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클라우드 게이트 앞에서 셀카를 찍는 것이 관례이다. 클라우드 게이트 셀카족이 등장할 정도로 이곳은 셀카의 성지이다. 이 작품은 셀카족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먼저 작품 그 자체가 상당히 멋있다.

크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거대한 은빛 구조물은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그리고 그 모양은 별명에 걸맞게 멀리서 보면 거대한 콩 모양이다. 이렇게 멋진 작품과 함께 자신을 사진에 담는 일은 즐겁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미는 셀카 한 장으로도 그 주변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콩 모양의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표면은 이음새가 없어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외부를 반사시킨다. 그래서 그 주변을 모두 표면에 담아낸다. 셀카를 찍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관광객과도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시카고의 멋진 스카이 라인도 한 번에 담아낼 수 있다. 클라우드 게이트가 외부 표면의 3/4 정도는 하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부를 반사시키는 특징 때문에 클라우드 게이트는 설치된 이후로 단 1초도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다. 사실 클라우드 게이트 그 자체는 고정되어 있고 일정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그 표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래서 이곳을 아무리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해도 그때마다 관람하게 되는 작품의 모습이 다르다. 시간에 따라 하늘은 수시로 바뀌고, 계절에 따라 관람객이 서 있는 공간도 변한다. 클라우드 게이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두 모습을 반영하며 연결시켜준다. 작품 이름 그대로 하늘과 관람객이 있는 공간을 연결해주는 게이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게이트이다. 즉, 이 거대한 조각상은 밑으로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 약 3.7m 높이의 아치를 따라 들어가면, 강낭콩 씨눈처럼 천장이 움푹 파인 공간이 나온다. 클라우드 게이트의 배꼽 같은 이 공간은 거울로 둘러싸인 방과 같다. 이곳에서는 재미있는 거울 놀이를 할 수 있다. 대상을 이리저리 다중 반사를 하며 오목한 부분에서는 왜곡되게 비추기에 자신의 몸이 늘어났다가 줄어든다.       



이렇듯 클라우드 게이트를 감상하는 일은 즐겁다.

다양한 매력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일단, 이 작품은 우리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감상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작가는 자신의 철학과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작품을 통해 구현한다.

우리에게 작품으로써 말을 거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없다면 곤란하다. 그 곤란함을 현대 예술이 요즘 겪고 있다. 현대 예술이 텍스트화 되고 난해해지면서 대중들의 발걸음이 점 점 멀어지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오직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의미로만 가득 찬 예술 작품은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처럼 예술 작품은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은 이미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작가들은 더욱 고민해야 한다. 작품성과 대중성, 이 둘을 어떻게 잡아 예술을 다시 우리의 삶으로 들여올지 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는 앞으로 현대 예술이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좋은 예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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