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펼쳤다.
검은 활자들이 하얀 종이 위를 물결치듯 흘렀고,
그 속에서 그는 조용히 나타났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 그러나 깊은 눈동자를 가진 인물.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너도 나와 같니? 방황하고, 고뇌하며,
때론 삶의 무게에 눌려 발걸음조차 무거운?”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읽어 내려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고뇌와 슬픔은
곧 내 것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
그가 느낀 좌절은 내 좌절이었고,
그가 바라본 희망은 내 안의 희망이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그는 나였고 나는 그였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함 속에서 길을 찾으려 애썼다.
“넘어졌다면, 흙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기회도 생긴다,”
그가 속삭였다.
그 말은 나의 닫힌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다.
그동안 나는 실패를 외면하고,
흙 속에서 자라는 씨앗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의 두려움 속에서 나를 보았고,
그의 용기 속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나에게 삶의 문제를 풀어주는 답이 아니라,
삶의 질문을 던지는 거울이었다.
질문은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너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나는 물음에 진실하게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끝나갈 무렵, 깨달았다.
그는 단지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였다.
그와의 공감은,
내면에 묻어두었던 질문들을 마주하게 했고,
질문들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이야기는
곧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책 속 인물이 나에게 준 깨달음은,
다른 누군가의 삶 속에서도 빛날 수 있는 씨앗이었다.
씨앗이 자라나 나와 닮은 또 다른 이에게
위로와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며,
다시 책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