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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Jun 15. 2020

[리뷰] 코로나 시대에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읽고

팬데믹의 세계와 달라진 세계

겨울의 끝부터 시들한 봄을 지나, 여름의 경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온통 여백뿐이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코로나는 일상을 갈아먹었다. 여름의 열기가 조금씩 느껴져도 마스크를 벗을 수 없으며, 마스크 없는 외출은 상상할 수도 없다. 때론 사회적 거리두기가 마음과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가 아닌지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코로나는 사회의 가려진 문제를 직면하게끔 했다. 자본주의의 휘청임, 인종차별 문제, 불평등, 기후 위기 등, 항상 1순위가 되지 못했던 문제를 나름 우선순위의 상층으로 올려놨다.




『포스트 코로나 사회』에선 코로나를 막기 위해 선잠을 자면서 일하는 의료진의 이야기부터 코로나가 우리에게 끼치는 사회적, 정치적 영향, 불평등한 세계, 인종차별 문제, 기후 위기 등에 대한 12개의 글이 실려있다. 코로나를 같은 시대에 겪으면서도, 미처 바라보지 못한 관점을 시원하게 집어주고, 코로나가 종식된 후의 미래를 맞이할 다양한 대안을 제시한다.


“온전한 신뢰를 보내는 눈빛들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만들어낸 자신감을 뒤집어써야 한다.”
p.30


감염병이 퍼져 일상이 마비된 시점엔, 의료진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희생에 대한 찬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와 동시에 의료시스템의 허점과 적절한 대처가 드러나기도 하며, 정치계에선 공중보건에 대한 지원계획과 법안을 그제야 입에 올린다. 간호사에게 행해졌던 부당한 대우에 대한 개선을 드디어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외신에서도 찬사를 하며, 사회적 거리두기, 드라이브 쓰루 선별 진료소 등 한국의 코로나에 대한 대처를 ‘K-방역’이라고 칭하며 한국을 코로나 대응의 모범 국가로 소개한다. 그러나 ‘K-방역’을 통한 한국의 성과를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 대응 과정에서 국가 소재 병원의 인력 부족 문제, 과도한 개인 정보 공개 문제, 특정 집단 혐오 문제, 평등하지 못한 복지와 보건 문제 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31번 환자를 비롯한 신천지 집단을 중심으로 대구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럼에도 대구 시민들의 뛰어난 시민의식과 대응으로 그 외의 지역으로 거대한 전파를 막을 수 있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코로나를 등에 업고 온라인을 통해 곳곳에 자리했던 혐오 문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한국에서 크게 유행한 원인이 절대적으로 대구 지역의 문제가 될 순 없지만, 지역 차별적인 발언이 온라인에서 나돌기 시작했으며, 신천지를 규탄함과 동시에 기독교를 묶어 종교 자체를 욕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을 땐, 굳이 헤드라인에 특정 소수집단을 넣음으로써 성소수자 혐오를 조장했다. 뉴스 댓글 창엔 당연하다는 듯이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등장했고, 언제나 높은 좋아요를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이 검사를 꺼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호흡기 증상이 있으면서도 아프다고 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체제 때문이고, 힘이 약한 노동자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이름만으로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뒤집을 수 없다."
p.18
"아프면 직장을 쉴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방역 당국의 권고는 새로운 노동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에둘러 기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p.122


코로나는 필수인력과 불필요 인력을 나누기도 했으며, 가택에서도 충분히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동시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는 노동자의 암울한 단면을 드러냈다. 전염병이 퍼졌음에도, 일을 쉬거나 가택에서 업무를 수행할 처지가 되지 않는 노동자는 당장 필요한 돈과 생활을 위해 건강을 담보로 일을 해야만 한다. 이들에게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는 노동자의 존재는 새로운 노동체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며, 그들의 쉬지 못함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수혜 입는다. 착취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자본주의는 성립된다.


그동안 한국은 80년대 경제성장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찬란한 가능성을 맛봤으며, 믿기 어려울 만큼의 성장을 이뤘고 그로 인해 국민 생활수준이 크게 상승했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큰 믿음이 만연하다. 그러나 코로나가 도래한 후, 우린 자본주의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단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난 후, 어쩌면 항상 함께하게 될 수도 있는 이 존재의 등장 이후에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며, 달라지지 않아선 안 된다. 코로나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명분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해도 모두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위태로운 시도들이 이어지면 걱정이 앞선다. 감염병과 혐오가 하나 되면 끔찍한 차별 바이러스가 생성되듯, 민주화와 정보화가 맞닿으면 투명한 절차라는 민주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특정인을 골라내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p.86


한국이 코로나를 나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확진자 동선 공개'가 있다. 이는 확진자의 과거 동선을 CCTV, 신용카드 내역 조회, 진술 등을 토대로 역학조사하고, 인접 지역의 주민에게 경고 문자를 발송함으로써 해당 장소를 방문한 주민의 거리두기를 강화하고, 자발적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개인 정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불만이 번번하게 나왔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나름 잘 지켜질 수 있었던 큰 이유론 사람들의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건강 문제보단, 동선 공개와 개인 정보 공개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순되게 이태원 사태에 대해선 성소수자 집단의 자발적인 신고와 동선, 개인 정보 공개를 강요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내로남불이아말로 이런 상황 아닐까.


각국은 똑같이 받아든 오픈 테스트를 함께 풀려는 협력과 연대의 국제 공조는 하지 않고 저마다 대문을 걸어 잠그기 바빴으니, 불안한 개인이 의지할 데라곤 좋은 싫든 제 나라 정부뿐이었다.
p.81


코로나가 중국의 우한이란 지역에서 발생했단 정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종혐오를 터트렸다. 한국인들마저 중국인들을 비위생적이고 야만적이라고 욕했고, 국경 자체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중국을 넓게 보면 아시아고, 한국 역시 아시아에 속해있다. 아시아를 제외한 지역에선 중국, 한국, 일본, 대만 등의 아시아인을 구별하지 못하며, 코로나 발원지인 중국에 대한 혐오는 물 흐르듯이 아시아인 혐오로 연결된다. 중국인을 욕하던 우리 역시, 유럽 지역을 가면 중국인과 같은 아시아인이며, 이로 인한 인종차별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코로나 발원에 대한 조사는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이며 누구나 궁금해하는 사안이다. 중국이 발원지란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 해서 특정 국가와 인종을 엮어 혐오의 정당성을 성립해선 안 된다. 이는 불필요한 과정이다.


코로나는 보편복지의 오류를 알려주기도 했다. 의료 서비스는 빈곤과 부유, 거주 지역, 인종과 국가와 무관하게 모두가 제공받아야 하며,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자 평등해야만 하는 서비스다. 그러나 쪽방 거주민, 장애인, 노인 등 사회취약계층은 코로나 대처에서도 불평등을 겪게 된다. 쉽게 공적 마스크를 구매하지 못할뿐더러,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렵다. 또한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위생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보편복지란 말 그대로 보편적이어야 하며, 보편이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함을 일러준다.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보편적이지 못하며, 모두에게 의료 서비스가 적용되지 못하다면 보편복지가 아니다. 코로나는 불평등한 이들에게 불평등을 다시금 씌웠고, 사회취약계층이 존중받을 수 있는 대안을 요구했다.




어쩌면 코로나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고, 달라진 상황에 나름 적응하며 살길을 찾아가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모두의 뇌리에 전해지기도 했다. 코로나와 같은 인수 공통감염병의 원인으로 무분별한 개발이 지목되었고, 기후 위기에 대한 대처가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코로나와 같은 인수 공통감염병이 등장하게 될 것이란 담론이 나오기도 했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은 앞으로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는 공통 위협이기에, 전지구적 협력과 보다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공중보건을 확립해야만 한다. 코로나로 우린 기후 위기, 불평등, 혐오와 차별에 대해 배웠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 곳곳의 허점을 찾아냈기에 다음 위기엔 보다 능숙하게 대처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게 되면, 국민 간의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갈 것이다. 이번엔 그렇다 쳐도, 물론 그렇다 치기엔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언젠간 다시 도래할 감염병이란 전세계적 전쟁에선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여파가 언제 사라질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라질 것이란 희망을 품고 지금처럼만 온 국민의 협력을 이어간다면, 이번 전쟁에서 역시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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