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알았거나 완벽히 몰랐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by 은연주

변호사가 몇 번쯤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대방 변호사가 그러는데, 홍길동이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본인도 모르나 봐요."


조정이 실패한 뒤에도, 가사조사, 이어지는 기일과 중간에 반소를 통해서 다시 시작된 지루한 싸움 와중에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 여러 번 있었다. 그가 내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고 어떠한 대화도 없이 단절된 2023년 6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 무의미한 싸움을 빨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소통은 실패했다. 계속 기다렸고 여러 번 기회를 줬지만 늘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무례했다. 막말로 누가 유책이냐 잘잘못을 떠나서 피해자 역시 언젠가는 자신을 위해서 그 관계를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나 홍길동은 본인이 스스로 파탄 내놓은 관계를 마무리지을 줄 몰라, 끝없이 싸움을 걸고 그 싸움을 유지하는 데에만 온통 진을 빼고 있다.


늘 궁금했다. 그래서 걔가 진짜 원하는 게 대체 뭘까?




홍길동이 서면에 지 손으로 제출한 자기 정신감정서에는 임상심리사의 소견이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 갈등 해결에 심리적 불만족이 온전히 해소되지 못할 수 있어 우려된다."


상대방 변호사는 조정을 위해 몇 번이나 노력했을 것이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 소송을 끝내기 위해 최대한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변호사 말도 듣지 않는다고, 법 조항을 일일이 스스로 찾아서 자기 변호사에게 제출한다고. 변호사를 괴롭히는 의뢰인이었다. 내가 알던 홍길동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당이 말한 것처럼 정말 귀신이라도 씐 걸까. 무당은 내가 밝히지도 않은 외국이 보인다면서. 거기서 남자가 뭘 잘못 만지고 장난쳤다가 크게 벌전 받은 거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길동의 상태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언제 해방될 수 있는지에만 온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변호사의 말끝에 달린 단어들과 임상심리사의 평가서 위 낱말을 모두 종합해 봐도 내가 알던 사람은 없다.

내가 만난 적 없는 사람이다. 나는 원고 홍길동과 대학병원 정신과 심리평가서 속 수검자 홍길동을 모른다.

연애 시절 그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남의 마음도 꿰뚫어 보는듯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였다.


몇 년 전쯤, 친한 친구 A가 그녀의 다른 친구 B와의 관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요는 정말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씩 선을 넘는듯한 발언이나 과격한 행동 때문에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내용이었다. 분명 A를 위하는듯이 말하는 B의 애정어린 행동 뒤에는 폭력적인 가시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제삼자인 내 눈에는 나와 A가 친한 것보다, A와 B의 사이가 더 친한 듯 보여서 함부로 그 둘의 사이를 재단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친구의 친구인 B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직접 겪은 것도 없었다. 사실 당사자인 A도 나도, 내심 B가 질투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우정에 어떻게 질투심이 공존할 수 있겠냐며 둘 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A는 길동 오빠가 예리하고 분석을 잘하니깐 누구 얘기인지 말하지 않고, 한 번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우리는 여느 30대 커플처럼 평일에는 각자 일 열심히 하고 주말마다 캠핑을 다니며 알콩달콩 연애 중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홍길동은 대뜸 말을 잘랐다.


"그거 열등감이고 자격지심이야. B 걔는 자기가 열등감 있는 걸 들키기 싫어서 A한테 더 그러는 거고. 무의식적인 행동이야. 근데 A 그거 니 친구 뫄뫄 아니야? 저번에 뫄뫄 직접 만나보니깐 좀 그런 성격 같던데. 긍정적이고 착해서 거절 잘 못하고. B같은 애들은 그런 밝음 자체에 열등감이 있어. 지 내면이 썩어서."


어찌 그리 사람을 잘 보냐고 우리가 손뼉을 치면서 놀래자 홍길동은 말했다.


"감정 덜어내고 보면 다 보여. 이거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친구랍시고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다가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쥬? 너네 다 너무 감정에 끌려다니는 애들이라 그래."




열등감과 자격지심. 무의식적인 행동. 그건 사실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홍길동은 정말 자기 자신을 모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꽁꽁 숨겨버리고 문을 잠근걸까.

그를 조금이라도 떠올리면 오히려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이라 더 모르겠다.

성난 파도가 오늘따라 시끄럽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처럼 파도가 나를 삼켜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