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을 파생명사로 설명하시오.
1. 열흘 간의 연휴는 무자비하게 길었고, 나는 내내 혼자였다. 집에 계속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 냉동식품을 입에 쑤셔 넣었다. 이토록 주변에 아무도 없이 고립된 적이 있었나. 평화로운 지루함은 충분히 견딜만했다고 애써 자평해 본다.
2. 공황발작이 다시 찾아왔다. 꼬박 2년 만이다. 2년 반 전에 김, 아니 홍길동이 가면을 벗고 내 등 뒤에 칼을 꽂은 뒤부터 공황발작에 시달렸다. 반년 정도는 공황장애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그러니까 마지막 공황발작 약 처방이 2년 전이다.
2-1. 이번에는 홍길동 때문이 아니라 회사 때문이었다. 연휴에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카톡보고. 너네만 연휴 아니고 나도 연휴야.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것 같은 분위기. 나르시시스트가 가스라이팅의 장인이라면 이 회사는 거대한 가스라이팅 그 자체인 것만 같다. 다행히 2년 전에 먹다 남은 필요시 약이 있었다.
3. 이제는 다시 회사를 옮길 기운도 없다. 몸 안에 고름이 가득 찼다. 염증수치 맥스를 찍고 결국 몸 안에 장기 하나는 떼어내야 이 짓을 멈출 건가 보다.
4. 재회타로, 재회주파수처럼 뭐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마음에 이직/이동에 대한 전화신점을 봤다. 순전히 궁금함 반, 재미 반이었다. 용한 점쟁이는 아무개 신상 정보도 없이 단지 생일 하나만으로 상황을 줄줄 읊었다.
"연주 씨는 원래 인생이 즐겁고 재미난 일로 가득 차있다고 믿는 사람이네. 제일 처음 느껴진 건 순수함, 약간 어린애가 신난 것 같아. 근데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안 맞는 곳에서 천천히 죽어가지? 미안한데 자기 능력이랑 상관없이 대기업은 애초에 안 맞는 사람이야. 자유로운 영혼에 역마살 있는 것도 스스로 잘 알잖아? 이직 같은 건 당장은 안 보인다. 거기서 아파가고 있네. 지금 몸 안 좋아요. 건강검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5. 아닌 게 아니라 지난달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이, 나 자신이 더 이상 아깝지 않다. 한 번에 쉽고 깔끔하게 죽을 수만 있다면 당장 독약도 마실텐데.
6. 나(그리고 뿌리)에 대해서 낱낱이 까발리기로 작정했다. 엄마를 피해서. 그래서 은연주라는 필명이 아닌 새로운 가짜이름과 모종의 공간이 필요해졌다. 단지 이곳은 간헐적으로 들러서 생존신고를 할 예정이다. 어촌으로 귀양살이를 자처한 어느 이혼녀의 옥중일기* 같은 거.
*6-1. 올해 을사년 신년운세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이 오히려 감옥이 되는 의미가 있는 운이다.' 흠. 아직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지 못했다. 이번 주에 일찍 퇴근하는 날이 있다면 그 영화를 봐야지.
7. 오늘 밤은 악몽 없이 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