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해지지 않고 살아남기

by E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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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캐치볼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보면 멈춰서 보게 된다. 받으라고 던지고, 다시 던지려고 받는 기묘한 놀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허허실실 웃으며 공을 주고받는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까.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공의 의미는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어쩔 땐 사랑 같고 어떤 땐 고민 같다


내게도 캐치볼 메이트가 몇 있다. 내 고민을 그들에게 툭, 하고 던지면 꼭 다른 무언가가 되돌아왔다. 우리는 미움과 사랑을 던지고, 방황과 성장을 주고받았다. 고민에 이야기가, 방황에 갈등이 곱해지는 과정에서 삐져나온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참 좋았다. 혼자만 갖고 있으면 결코 주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많던 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건지, 해결된 건지, 아니면 잊힌 건지 모르겠다. 내 손에 쥐고 있을 땐 그렇게 무겁던 공이, 던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배워서, 또 새로운 공이 생기면 던져 버리고야 만다.


공은 어디서고 날아온다. 퇴근길 버스에서 듣는 라디오 사연에서, 뉴스레터를 읽다가, 회사 엘리베이터를 대기 하는 기나긴 행렬에서도.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던진 고민을 받을 수 있다. 수요일마다 받아보는 뉴스레터 ‘우시사’에서도 새로운 공을 발견했다. 신형철 작가님의 마지막 편지는 독자들의 편지에 답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 거기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30대 직장인 손형준 님은 “독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내게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지만, 정확한 진단명을 알지 못한 슬픔의 진단서 같았다.

‘독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얻은 별명이 울보였던,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생활기록부 인성 칸에 '마음이 여려'가 적혀 있는 나는 "독해져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쭈굴해진다. “넌 너무 애살이 없어”는 말을 수시로 들으며 자랐고, “우린 독기가 없잖아” 란 말도 쉽게 내뱉곤 했다.


손형준 님은 ‘온기’를 상실하기 두려우셨던 것 같다.

나는 감수성이, 염치가, 부끄러움이, 작고 부지런한 것들을 향한 나의 오랜 사랑이 사라지고 흐려질까 무섭다. 과거에 내가 부끄러워했던 말들을 내 입으로 하게 될까봐, 차갑고 잔인하다고 제멋대로 판단하던 행위를 내가 답습하게 될까 무섭다. ‘독해진 나'는 스스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의 내가 되기 위해 독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평범한 재능으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내게 ‘독해지지 않기’가 옵션이 될 수 있을까? ‘독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타고난 이들이 고민하기 좋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평균수명은 들어본 적 없는 숫자로 늘어나고, 문명은 SF소설이 그려 놓은 청사진을 거침없이 빗겨난다. 기술이 인간을 ‘일’로부터 해방해 줄 거라고 하지만, 인간의 수명 탈출 속도에 도달할거라는 확신 속에서 지금 자꾸 ‘생존’이 걱정이다.


회사 짝꿍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회전문 앞에서 나는 이 고민을 그에게 던져버린다.

“전 요즘 이게 고민이에요. 독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회전문에 먼저 들어가는 것조차 망설이며 서로 양보하다 결국 나보다 뒤 칸을 통과한 내 짝꿍이 말한다.

“근데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독하다고 생각조차 안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독해져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그 사람들은 그냥 하는 거 아닐까요?”

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다. '독해져야 하는데 독해지지 못하는 사람'과, '독해진다는 생각 없이 강한 사람'. 나는 자신을 줄곧 전자로 생각해 왔다. 아마 내 짝꿍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온화하고, 사려 깊고 부드러운 결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 독하지 않은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풀어 서술해보자.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메뉴를 먹으러 가자고 해도 싫은 티를 하나도 내지 않는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유심히 챙겨보지 않으면 쉽게 그의 호오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기깔나는 보고서를 써 놓고도 생색내거나 과시하지 않아서 옆에서 계속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고 유능한 사람인지 부채질을 해줘야 한다. 몇 줄만 적어 봐도 알겠다. 나의 짝꿍이야 말로 ‘독해진다는 생각 없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강하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독하다’라는 태도를 품지 않았을 뿐.


종종 '독함’은 공감 능력 결핍과 무례함, 맹목성으로 읽힌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도덕적, 윤리적 숙고를 생략하고, 사소한 위반이나 범법 앞에서 눈도 끔쩍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작은 목소리와 사건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목표에 골몰해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어쩌면 나는 독함을 냉혹함으로 오독한 것 같다.


진짜 독함은 사랑과 헌신으로 완성된 열정이다. 노동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직접 공장에서 망치를 들었던 시몬베유, 평생을 자기 방에서 지내면서 자신만의 언어적 마법을 완성한 에밀리 디킨슨, 50년 동안 같은 방에서 비슷한 병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본질의 온도를 그리고자 했던 조르지오 모란디처럼. 사랑과 헌신으로 강인한 부드러움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 그 ‘독함’이야말로 내가 평생 선망해온 결이다. 독해질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독함이라면 용기를 내고 싶다. 그들의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내가 나를 더 좋아할 것 같다. 혼미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혼돈 속에서 덜 방황하며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시대의 잣대로 보면 나는 약해빠진 사람이지만, 나에게도 강한 점이 있다. 채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읽고 쓰는’ 행위를 위해 매일 조금 더 늦게 자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내가 나를 좋아하기 위해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한발짝 다가가는 나의 귀여운 발버둥. 이 발버둥이 나의 독기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독해질 것이다. 발버둥일지라고 나아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독함은 아마 ‘모두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가도록 나를 이끌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조금 더 고유한 내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나라면 꽤 마음에 들 것 같다. 독할 결심을 꿀꺽 삼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는 이 즐거운 연재를 시작한다. 독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나의 친구들에게 다시 공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독하다”고.


이 글은 내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첫 번째 캐치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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