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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광웅 Jul 14. 2016

100일 내가 본 유럽-베를린(Ⅱ)

유물, 분단

2015년 11월 5일


페른제투름. 알렉산더 광장


유물- 페르가몬 박물관

                          

1층에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파란색 벽돌로 만들어진 바벨론의 이슈타르 문과 그 뒤에 있는 그리스 양식의 밀레투스 시장의 문이다. 이 문들은 실제 크기로 재연되어 있어서 박물관 높이의 전체를 차지할 만큼 거대했다.

1층의 고대 근동 지방 유물은 시대에 따라서 전시가 되어 있었다.

아시리아 쪽의 유물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봤었기 때문에 익숙한 모양의 유물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 박물관들은 아시리아 유물 외에도 볼게 너무 많아서 아시리아 쪽은 맛보기만 하고 넘어갔었다. 페르가몬 박물관에 와서야 이런 유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82'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는 박물관은 재미가 없다. 유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달아야 박물관에서 배울 수 있다. 서울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는 한반도 내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들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일부 전시실에는 중국, 일본, 인도와 같은 타 아시아 국가에서 가져온 유물들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사료가 된다면 외국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박물관 관람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유럽여행을 하게 되면 규모가 큰 박물관에는 자국의 유물 수보다 타국의 유물 수가 현저히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유물들은 주변 국가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스와 같은 고대 국가들의 유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도 고대 근동의 아시리아 유물들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방의 이슬람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이슈타르의 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바벨론 제국의 강성함을 알게 해준다. 고대 그리스 유물인 밀레투스 시장의 문은 크기에 압도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실제 크기로 복원된 거대한 두 개의 문 앞에 서면 고대의 한 장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박물관들이 밀집된 박물관 섬
「이슈타르의 문」
「밀레투스 시장의 문」


고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뿐만이 아니다. 유럽의 대표 박물관인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도 상당수의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스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의 유물들이 어떻게 유럽으로 가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영국의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의 경제 사회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다. 유럽의 국가들은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과 노동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유럽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대륙에서 찾았다.


유럽에서는 활발한 식민지 개척 사업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유물 발굴 사업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물은 전쟁을 통해 얻어오기도 했고 다른 나라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유물들은 부를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페르가몬 박물관의 유물들의 대부분도 발굴 사업을 통해 얻어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박물관의 유물들은 발굴한 것 이외에도 영국에서 구입한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영 박물관의 유물 수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인데  다른 나라에 팔기까지 한 것을 보면 제국주의 시대 당시 대영 제국의 영향력이 가늠이 될 것이다.


베를린 대성당
구 국립 미술관



2015년 11월 6일


장벽은 무너져야만 해


분단-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나는 안내문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다. 그 전에는 왕래할 수 있었지만 장벽이 세워진 이후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탄압이 심해질수록 사람들은 더 탈출하려고 했고 동독에서는 장벽을 더 높게 만들고 새로 짓고 장애물들을 설치하고 스파이 경찰을 심는 등 더 강도 높게 사람들을 차단했다. 탄압이 심해지자 심지어 동독의 군인들도 서독으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의 탈출을 도와주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었다. 땅굴도 이 방법 중 하나였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가족끼리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락도 못하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탈출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강제적으로 억압시키는 방법이 얼마나 반인륜적인지...  

'유럽 100일 여행 中 D-83'                                              


ES GILT VIELE MAUERN ABZU BAUEN


Republic of Korea/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South Korea/North Korea,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한/북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세계는 곧바로 냉전 체제에 돌입했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을 내세웠다. 미국을 포함하여 미주, 서유럽, 태평양권 나라들은 자본주의 진영으로 소련, 동유럽, 중국은 공산주의 진영으로 갈라섰다. 각 나라들은 각각 미국과 소련 편에 서서 이념을 확고히 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존재했다. 유럽의 독일, 동아시아의 대한민국이 그러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지정학적으로 양 진영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1990년 10월 3일 분단된 독일은 하나의 독일이 되었다. 아직도 베를린에는 분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잿더미 속에 있었다.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한 분할통치를 받았고 그 후 협상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은 서독으로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동독으로 남게 되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동부에 위치했지만 중요한 거점 도시였기 때문에 도시 자체가 분단된 특수한 경우다. 베를린은 도시가 나뉘었기 때문에 그 어느 곳 보다 양 진영의 교류가 활발했다.


베를린의 분할통치 지도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알바들


분단 초기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이는 전체적으로 소련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보다 자유를 찾으러 자본주의 진영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베를린의 분단 지점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장벽에는 군인들을 주둔시켰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발견할 시 무조건 죽였다. 유일하게 넘나들 수 있는 통로는 프레드리히 거리에 있는 체크포인트 찰리였다. 이 곳은 아직도 미군의 검문소 건물이 남아 있는 장소다.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이 분단의 흔적을 느끼고자 이곳을 찾아온다. 지금은 미국인 흉내를 내는 독일인들이 군복을 입고 근무를 서고 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도 분단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슈프레 강변을 따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걷다 보면 자유를 갈망하는 독일인의 염원을 들을 수 있다. 서 베를린 쪽에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보면 그림보다는 그라피티 위주로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동 베를린 쪽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는 오래된 그라피티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려진지 얼마 안 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에서 바라본 장벽이 차이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오버나움 다리. 슈프레 강변
「형제의 키스」


분단은 독일에게 과거가 됐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북한은 핵으로 한반도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고 주체사상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평양을 제외한 다른 도시들은 이미 제기능을 멈춘 지 오래지만 북한의 독재자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다. 분단이 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은 언어, 문화, 경제, 사회, 정치 모든 것이 판이하다. 대한민국에는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통일 비용과 사회 불안정과 같은 위험 요인을 무릅쓰고 굳이 통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전날 밤 나는 올리버, 이네스와 함께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네스의 부모님은 동 베를린에 살고 있었지만 사촌이 서 베를린에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도 사촌과 연락하기 위해 왕래를 하셨지만 소련의 통제가 심해지자 불가능해졌다. 동 베를린에서는 서 베를린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철책을 치고 군인들을 주둔시켰다. 그들의 부모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장벽은 독일 시민들에 의해 갑작스레 무너졌다. 너무 어린 시절이어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 날 베를린 시민들은 군사의 개입에 의해서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독일의 통일은 결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의 통일은 정치적으로 이룬 위로부터의 통일이 아니다.
독일의 통일은 국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이루어졌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베를린 장벽의 길. 베르나우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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