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써 온 ‘무엇인가?’ 시리즈가 특정 주제에 대해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 온 공부를 정리하는 성격이 강했다면 오늘의 주제는 그저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하나의 사례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생각으로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읽고 싶어 하는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시작하며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시고 글을 잘 쓰고 싶어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동안 제 주변에는 온통 일로 책을 보고 일로 글을 쓰는 사람들만 득실거렸기에 참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혹 질문에 답을 하거나, 주제넘지만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는데, 이참에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짧게 글로 남겨 보려 합니다.
그럼 흔히 좋은 글쓰기의 기본으로 언급되는 다독, 다작, 다상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다작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파트타임으로 아이엘츠 시험관 일을 하던 언어학과 박사과정 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평소 아이엘츠의 작문 주제가 매우 다양한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궁금했던 질문을 했습니다.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파트타임으로 아이엘츠 시험관 일을 하던 언어학과 박사과정 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평소 아이엘츠의 작문 주제가 매우 다양한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궁금했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보통의 영국인들은 이런 모든 주제에 대해 바로 이 정도 분량의 글을 쓸 수 있어?”
그의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물론 모든 영국인들이 그렇지는 못하지. 하지만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자기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제게는 이 답변이 매우 인상 깊었으므로 바로 글쓰기에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브런치는 자주 글을 올릴수록 노출이 늘어나고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는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글감이 없다’며 고민하는 작가들도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특정 주제에 대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글만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분야에서든 작가를 지망한다면 이는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역량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다독
지나가다 우연히 어떤 분이 읽은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어떤 방식으로 표시하고 정리해 두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구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남겼던 답변을 옮겨 봅니다.
"저는 노트패드 앱에 옮겨 적고 책 제목과 페이지를 함께 기록합니다. 책에는 굳이 한다면 해당 페이지에 마킹 테이프 정도만 붙여 놓습니다. 밑줄이나 필기를 해 두면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그 부분만 보고 다른 부분을 놓칠 수 있어서 가급적 책에는 직접 표시하지 않습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면 이전에 놓친 장면이 새로 보이듯 책도 마찬가지인데 미리 해 둔 표시는 새로운 발견에 방해가 됩니다."
사실 억지로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많이 읽어 두면 그 내용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오게 됩니다. 저는 글이나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면, 굳이 내용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었다면 이미 기억 어딘가에 새겨진 것이고 이렇게 누적된 기억들이 자극을 받으면 새로운 연결고리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개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의 사고 체계 안에서 어떻게 배열되는가?"입니다. 그 고유한 배열 자체가 결국 나만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다만 입력되는 양이 적으면 연결고리의 수도 적어지게 되므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독입니다. 저는 젊을수록 기억을 정리해 붙잡아두기보다 경험 자체를 더 많이 쌓는 방법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데 독서 역시 읽은 내용을 정리할 시간에 한 줄이라도 더 읽기를 추천하는 편입니다. 앞의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제 아이에게 독서 노트를 쓰게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독, 다작, 다상량 중 가장 중요한 토대는 다독입니다. 다독이 없이는 앞서 언급한 의미의 다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상량
다독을 통해 수많은 연결고리가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다작이 가능해졌다면, 다음 관건은 글의 질입니다. 다상량은 책뿐 아니라 개인이 사적, 공적 삶에서 겪은 누적된 기억들을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엮어나갈 것인지, 어떤 표현 형식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매체를 이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수단입니다.
다독과 다작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다상량은 글을 쓰는 내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포함합니다. 더구나 모든 글은 책의 형식이든, 브런치나 블로그, 스레드나 트위터와 같은 인터넷 공간이든 개인의 일기장이 아닌 사회의 공론장에 던져지는 순간 반드시 독자를 전제하게 됩니다.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공개된 곳에 글을 올리는 순간 크든 작든 일정한 사회적 책임이 발생합니다. 물론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고, 조직적 검열은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최소한 자신의 의도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도가 반드시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거나 아름다운 칭찬과 격려의 언어로 점철된 미화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분명히 어두운 그늘과 존재 자체의 유한함에 기인한 고통과 좌절이 늘 함께 합니다.
이를 글의 형식으로 공론장에 드러낸다고 해서 지탄을 받거나 외면을 받는다면 그 사회는 빅브라더가 통치하는 기괴한 다중현실의 장일뿐, 건강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회칠하여 꽁꽁 바른 무덤은 언젠가 부패를 이기지 못해 폭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주체가 자신의 의도조차 고민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배설하듯 쏟아내는 글은 읽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더할 뿐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자신의 도파민이 충족되고 비슷한 욕망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아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간다면 의미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결국 주어진 유한한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파괴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외에 다른 자유가 더 주어져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개인에게 이 자유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