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_ 관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

하나의 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

by Evanesce

Stereotype [ steriətaɪp ]

1. 고정관념

2. 고정관념을 형성하다


사람의 모습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한 가지 이미지를 통해 기억하고, 그 이미지 속에서 그 사람의 전부를 짐작하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짐작은 언제나 틀리고, 그 틀림 속에서 비로소 사람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며 변화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을 한 가지 모습만으로 단정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는 그 사람과 마주하는 방식에 따라 무한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사람들 앞에서는 오히려 나의 모습들이 잠겨 버리고,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한 사람 앞에서는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표정과 말투, 마음의 결이 슬며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 앞에서는 내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이유 없이 편안해지며, 어떤 사람 앞에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간의 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태도가 만들어진다. 그 모든 변화는 억지로 만들어내는 가면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지만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은 놀라고, 조금은 안도한다. 사람이란 생각보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존재이기에,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들이 단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끌어내어줄 누군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스스로가 만든 자아상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느냐는 나의 의지만이 아니라, 마주하는 그 사람이 건네는 시선과 분위기, 말의 미묘함들에 따라 조금씩 조정되고, 그 조정이 반복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몰랐던 나의 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괜히 단단해지고, 또 어떤 날에는 조용히 풀어지고,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을 꺼내게 만들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해할 만큼의 온도를 건네준다.


그 변화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마주하는 사람이 내면의 특정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그 두드림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며, 그 느슨함 속에서 새로운 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 변화의 순간은 참 귀하게 여겨진다. 억지로 연출된 인위적인 매력이 아니기에, 내가 가진 얼굴들 중 모르고 있던 하나가 자연스럽게 빛을 받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 빛이 이질적이지 않고 편안하게 스며들 때, 그 사람이 내게 건넨 무언의 온기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난 나의 새로운 얼굴이 결코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내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 '이게 어쩌면 본래의 내 모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보다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할 때 상대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부드러움을 느끼고, 조금 더 정직해지고, 조금 더 담담해지는 모습을 발견할 때, 그 변화가 단지 상대가 특별해서라기보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흐르는 공기 속에 '안전함'이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안전함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숨기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또 다른 얼굴이 조용히 드러난다.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다양한 면모는 혼자 있을 때 결코 모두 드러나지 않으며, 관계의 거울 속에서 비로소 싱그러운 빛을 띠며 떠오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울이 너무 반짝이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채 적당한 온도로 비춰올 때, 나조차 몰랐던 나의 모습이 슬며시 떠올라 그 사람을 향해 조금 더 밝게, 더 부드럽게 열려가는 것이다.


그 사실이 조용한 기쁨이 되고, 어떤 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마움이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새 얼굴을 품은 채, 그 모든 변화가 내가 가진 진실의 또 다른 형태임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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