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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Mar 21. 2022

당신에겐 베어낼 권리가 없습니다

번외: 시의 날에 부치는 시 한 편

처형식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의 처형식


실루엣이 길어 슬픈 여자가

등대의 눈을 닮은 남자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다가서지 말라고

모두가 말리는데도

재가 되어도 좋아, 고백부터 했던

그 여자의 허리가

거칠게 잘려 나가는데


아름다워라, 세상에

봄날의 연두를 꿈꾸던 플라타너스의 속살이

눈처럼 하염없이

흩날리는구나!

중심을 파고드는 전기톱의 굉음에

눈 감은 가로등 혼자 속으로 울고


잘린 나무 자리에선

어린 연인들의 긴 포옹

모르고 넘어가는,

밤의 세계는 고요하기도 하지


피비린내 나는

비명횡사의 풍경

하찮고도 장엄했던 그 순간을

바라보기만 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자주 어두워지는, 한낮의 슬픔에 대해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 김윤선 시 '처형식' 전문



위의 시 '처형식'은 화창한 어느 봄날에 온 시입니다. 길을 걷다 말고 그토록 자란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그 자리에서 메모했다 완성한 시이지요. 그런데 요즘도 천변 산책길에서 잘렸거나, 잘려나가는 중인 나무들을 보곤 합니다.


가로수와 하천 가꾸기 사업의 하나라는데 왜 꼭 저렇게 잘라내야만 하는 건지, 좀 더 자연 친화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변을 산책하는 그 누구도 무성해진 나무가 방해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시의 날'을 맞아 잘려가는 나무들을 애도하며 썼던 시 한 편을 올려봅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 어디쯤에선 무고한 시민과 생명들이 죽고 파괴되는 중일 테지만, 여전히 야만과 참혹의 시대 속이지만,


그 속에서도 봄은 오는지 천변에 핀 제비꽃이 예뻐 몸을 낮춰 바라보았습니다. 잘려나간 나무들이 꼭 다친 사람들의 몸 같아 잠시 슬펐지만 보라보라 제비꽃을 보느라 그 슬픔을 또 잊어버립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마스테


천변의 잘린 나무들
석양을 배경으로 제비꽃/ 함부로 잘린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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