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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Oct 26. 2022

하나로 김밥의 탄생

김밥에 야채 하나만 넣어도 될까요?

                                                                               

한국인이라면 결코 그 맛을 모르기가 어려운 음식 중에 김밥이 있다. 맛있는 김밥 속에는 노란 단무지와 초록 시금치, 부드러운 달걀지단과 주홍빛 당근이 알록달록 들어가 보기에 예쁘다. 조린 우엉에 쇠고기 볶음까지 들어가 줄 때면 ‘그래 이게 제대로 된 김밥’ 이지 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었다. ‘비건’이 된 이후로도 이런 김밥 싸기 공식이 익숙했기에 고기 대신, 대체 육을 다져 볶아서 넣기도 했다. 그러다 또 '김밥'에 시들해진 시기가 와서 한 동안 멀리했던 김밥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대로 꽂힌 김밥이 생겼다. 약간은 식상해진 이전의 김밥 맛을 깨트리는 맛인 데다 레시피도 단순해서 소개할 마음이 생겼다. 사실 '하나로 김밥'의 탄생 배경에는 수시로 일어나는 ‘귀차니즘’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이 귀차니즘이 갱년기 때문인지, 요리하며 보내는 시간에 대한 가치기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게으름에 대한 자기 합리화라 해도 할 수 없다만 ‘최고의 요리’는 손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라는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맛있고도 균형 잡힌 식사 이후, 주어지는 시간을 요리보다 더 창조적인 것에 쏟아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니까. 물론 요리를 통해 자신의 창의성을 이끌어내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예외지만 말이다.    

  

지금 소개하는 ‘당근 하나로’ 김밥이 아니어도 어떤 채소 한 가지만 넣고 말아도 김밥은 기대 이상의 ‘맛’을 전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향긋한 '냉이'를 넣으면 ‘봄날의 냉이 김밥’이 되고, 더덕을 넣으면 ‘봄날의 더덕 김밥’이 되더라. 갓 지은 현미밥과 김은 있는데 단무지와 시금치와 당근은 없고, 냉장고 속에 상태 괜찮은 야채가 있다면 결코 김밥 싸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으리라. 물론 김밥이 먹고 싶다면 말이다. 


                                                                                 

냉이라도 넣고 김밥을 싸면 어때서?’라는 생각과 함께 냉장고 속 시들기 직전의 냉이를 구출했다. 깨끗이 씻어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 찬 물에 헹궈 꼭 짜 놓았다. 다행히 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따끈한 현미밥을 볼에 담고 식초 조금, 유기농 설탕 조금, 볶은 소금 조금, 참기름 조금, 통깨 조금 넣어 슬슬 펴서 섞었다. 다음으로는 다들 김밥 마는 식으로 속 재료인 데친 냉이를 좀 넉넉하다 싶게 밥 위에 펴놓고 김밥을 꽉 꽉 쥐며 잘 말아 놨다. 냉이 하나로 김밥의 완성이다.      

                                  

 ‘당근’ 도 넉넉히 있었다. 깨끗이 씻은 당근을 채칼을 이용해 채를 쳐서 기름을 거의 두르지 않은 팬에 볶았다. 당근에는 지용성 비타민A가 풍부하며, 기름에 볶을 때 영양의 흡수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담백한 입맛의 나는 기름은 아주 조금만 두르고 볶는다. ‘조금’, ‘약간’이런 식의 정확해 보이지 않는 계량법이 얼핏 주먹구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또한 손끝의 감각과 예민한 미각이 없다면 나오기 힘든 레시피가 아닐까 주장을 해 보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적당히 밥 위에 얹어 잘 말아내면 끝!   

  

하루를 사이에 두고 해 먹은 두 종류의 ‘하나로 김밥’인데, 이 김밥을 정말 맛있게 먹는 방법의 정점은 고추냉이 간장에 있다. 간장에 사과식초 그리고 초록색 고추냉이 소스를 적당히 짜서 풀어놓고 하나로 김밥을 콕 찍어 먹다 보면 한 줄, 어느새 두 줄을 순식간에 먹게 된다. 간혹 고추냉이가 많이 풀어진 쪽 간장에 찍어져 순간 매워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입안에 고여 드는 침과 함께 입맛이 도는 걸 느낄 수 있다. 

    

                                                                                    

접시에 케일 잎 한 장을 깔고 ‘하나로 김밥’ 한 줄을 얹었을 뿐인데 공들여 차린 밥상처럼 곱다. 맛있게 먹다 보니 나를 위한 한 끼도 너무 막(?) 차려 먹진 말아야겠다는 의욕도 생겨난다. 물론 일시적 의욕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날은 어쩐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식사 기도도 떠오르더라. 이 음식이 오기까지 거쳐 온 손길들, 재료들을 키우던 손길들, 대지에게 깊이 감사의 기도를 했다. 김밥을 다 먹은 후 마지막 케일 잎 한 장을 남은 간장 소스에 찍어 먹으니 그 또한 특별하고 산뜻했다. 내가 먹은 식사를 통해 단 하나의 쓰레기도 남기질 않는다는 건 꽤 뿌듯한 경험이었다.


김밥에 당근 하나만 넣으니 ‘당근’의 단 맛이 더 잘 느껴졌다. 김밥에 냉이 하나만 넣으면 입 속 한가득 '봄'이 채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여러 가지 재료들이 어울려 내는 맛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 가지 재료가 가진 온전한 맛을 느끼며 먹는 것도 좋았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게으른 내가 '김밥'은 먹고 싶고 집에 있는 재료로 해 먹은 성공적인 한 끼니였다. 

    

케일 잎으로 장식한 당근 하나로 김밥
왼쪽 : 냉이 하나로 김밥, 오른 쪽 : 당근 하나로 김밥을 초간장에 찍어 먹으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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