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그 맛을 모르기가 쉽지 않은 김밥. 맛있는 김밥 속에는 단무지, 시금치, 당근이 기본으로 들어가야 하며, 조린 우엉에 달걀지단, 쇠고기 볶음까지 들어가 줘야 당연히 제대로 된 김밥이라고 여기곤 했다.‘비건’이 된 이후로도 이런 김밥 싸기 공식이 그대로 남아선지 고기 대신, 식물성 콩을 원료로 만들어진 대체육을 넣어 말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김밥'에 시들해져서 한 동안 멀리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대로 그 맛에 꽂힌 김밥이 생겼다. 약간은 식상해진 이전의 김밥 맛을 깨트리는 단순한 레시피인 데다 맛있게 먹은 기억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사실 '하나로 김밥'의 탄생 배경에는 수시로 도래하는 ‘귀차니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리에 대한 내 게으름에 대한 자기 합리화라 해도 할 수 없지만 ‘최고의 요리’는 손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라는 생각에 가까운 편이다.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맛있고도 균형 잡힌 식사 이후, 주어지는 시간을 요리보다 더 창조적인 것에 쏟는 것을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요리를 통해 자신의 창의성을 이끌어내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예외지만 말이다.
이 말은 즉 위의 사진 ‘당근 하나로’ 김밥이 아니어도 어떤 채소 한 가지만 넣고 말아도 기대 이상의 ‘맛’을 전해준다는 말이다. 향긋한 '냉이'를 사다가 냉장고 야채 박스에 모셔만 놓고 3일째 되는 어느 날. 봄날의 향기를 누려보겠다고 보자마자 냉큼 장바구니에 집어온 냉이를 더는 냉기 속에서 시들어가게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김밥이 먹고 싶은데 기본 재료인 단무지도, 시금치도, 우엉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사러 나갈 만큼 부지런해지고 싶지 않은 그런 날, 갓 지은 현미밥과 김밥용 김은 있었다.
냉이라도 넣고 김밥을 싸면 어때서?’라는 생각과 함께 냉이를 깨끗이 씻어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 찬 물에 헹궈 꼭 짜 놓았다. 다행히 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따끈한 현미밥을 볼에 담고 식초 조금, 유기농 설탕 조금, 볶은 소금 조금, 참기름 조금, 통깨 조금 넣어 슬슬 펴서 섞었다. 다음으로는 다들 김밥 마는 식으로 속 재료인 데친 냉이를 좀 넉넉하다 싶게 밥 위에 펴놓고 김밥을 꽉 꽉 쥐며 잘 말아놨다. 냉이 하나로 김밥의 완성이다.
그러고 보니 ‘당근’ 도 넉넉히 있었다. 김밥에 넣을 유일한 재료인 당근 채를 쳐서 팬에 볶았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당근에는 지용성 비타민A가 풍부하며, 기름에 볶을 때 영양의 흡수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담백한 입맛인 나는 기름을 아주 조금만 두르고 당근을 볶았다. 정확하지 않은 이런 계량법은 손끝의 감각과 미각을 통해 나오는 주먹구구식 레시피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다 통하는 요리법이기도 하다. 그다음으로는 냉이 김밥 싸듯 잘 말면 끝!
하루를 사이에 두고 해 먹은 두 종류의 하나로 김밥인데, 이 김밥을 정말 맛있게 먹는 방법의 정점은 고추냉이 간장에 있다. 간장에 사과식초 그리고 초록색 고추냉이 소스를 적당히 짜서 풀어놓고 하나로 김밥을 콕 찍어 먹다 보면 한 줄, 어느새 두 줄을 순식간에 먹게 된다. 간혹 고추냉이가 많이 풀어진 쪽 간장에 찍어져 순간 매워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도 뭔지 모르게 입안에 고이는 침과 함께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다.
접시에 케일 잎 한 장을 깔고 ‘하나로 김밥’ 한 줄을 얹었을 뿐인데 공들여 차린 것처럼 곱다. 앞으로는 나를 위한 한 끼도 너무 막(?) 차려 먹진 말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물론 일시적 의욕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날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식사 기도도 떠오르더라. 이 음식이 오기까지 거쳐온 손길들, 재료들을 키우던 손길들, 대지에게 깊이 감사의 기도를 했다. 김밥을 다 먹은 후 마지막 케일 잎 한 장을 남은 간장 소스에 찍어 먹으니 그 또한 특별하고 산뜻했다. 내가 먹은 식사를 통해 단 하나의 쓰레기도 남기질 않는다는 건 꽤 뿌듯한 경험이었다.
김밥에 당근 하나만 넣으니 ‘당근’의 단 맛이 더 잘 느껴졌다. 김밥에 냉이 하나만 넣으니 입 속 한가득 '봄'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김밥 속에서 여러 가지 재료들이 어울려 내는 조화로운 맛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 가지 재료가 내는 맛도 내겐 너무 좋았다. 늘 그렇진 않지만 게으른 내가 '김밥'은 먹고 싶고 집에 있는 재료로 해 먹은 성공적인 한 끼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