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내리에는 엉이, 메밀, 창포, 부들, 머위, 미나리라는 이름의 '소'들이 살고 있다. '소'에게 이름이라니? '소'라면 의례 한우, 수입소고기, LA 갈비나 육우, 우유 생산용 젖소라 부르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름이 있는 소들이니까 적어도 '고기'가 될 운명은 피해 간 소들인가,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육되는 수많은 소들에게 이름까지 붙여준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이름 있는 소들의 이야기'는 2021년, 인천의 한 목장에서 시작되었다. '동물해방물결'의 홈페이지에 직접 소개해 올린 이 여정의 시작을 읽다 보면 활동가들은 그 목장에서 '소 15명'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소를 일반적 호칭인 '마리'라 부르지 않고 '명'이라는 호칭을 쓴 것도 특별하다. '소'들을 구조해 낸 '인간'의 마음이 읽히는 것만 같다.
흙 위에서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는 꽃풀소들
소들은 소위 '육우'라고 불리는 홀스타인종 남성 소들이다. 젖이 나오지 않는 남성 소는 태어난 지 약 2살이 되었을 때 도살되어 '고기'로서 팔려나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2살을 앞두었다는 것은 곧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기도 했을 것. 이 소들에게 '죽음'이 아닌 '자유'를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작년 겨울 첫눈 내리던 날의 꽃풀소들이 날뛰기 직전
'소를 구해낸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강인하게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들풀과 들꽃을 따왔고, 이들 모두를 부를 때는 '꽃풀소'라고 불러주게 되었다. 이름 속에 담긴 간절한 바람 또한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이상하고도 특별한 보금자리 여정의 시작을 듣고 보고 알게 된 사람들 중 시민 1,684명이 함께 동참하게 된다. 필자 또한 이 시작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소'가 고유의 생명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닌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이다. 그러므로 도살될 '소'를 '살리기 위해 구조'한다는 것은 '통념에 맞서는 용기'라는 생각마저 든다. 비건 세상을 꿈꾸며 '윤리적 비건'을 선택해 살고 있는 나조차도 결코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신내리에 사는 추현욱 씨는 '기후 활동가'이자 꽃풀소들의 돌보미이기도 하다. 가족과 함께 달뜨는 보금자리 속으로 들어가 꽃풀소들을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다. 본인 포함 아내와 두 아이가 모두 비건인 비건 가족으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과 가치를 직접 실천해 내는 모습은 경이롭다. 대면해 직접 그 삶의 방식에 대해 대화해 본 적은 없기에 내 짐작과 생각이 조심스럽기도 하다만, 나는 얼핏 그 삶의 모습 안에서 '수련자의 삶'을 본다.
왼쪽 : 꽃풀소들과 친해진 비건 어린이/ 오른쪽 : 국회에서 동물권 발언하는 추현욱씨
그는 108 요가 말라 염주를 목에 걸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을 시간도 여유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날마다 소들의 똥을 치우고 건초를 채워주는 일상 또한 수련자로서의 삶'의 모습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느끼는 모두에게 자유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동물해방물결'에서 비롯된 이 멋진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올해로 3년 째이다. 가급적 빨리, 많이 몸을 키워 재생산해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는 게 육식산업의 실체라고 본다. 그 와중에 꽃풀소들은 합법적(?) 죽음의 순환고리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생명체들이다. 그때 구조하지 못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생명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우리 곁에서 흙을 밟고 호흡하며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적어도 나에게 온 이 '특별한 기분'은 인간이 꽃풀소들과 공존해야 할 까닭에 대한 설명이 되기에 충분했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이 공장식 사육이라느니, 종차별 철폐를 주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드디어 '소를 죽이는 일' 말고 '소를 살리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소에 비해 훨씬 작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반려해 평생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책임감과 각오는 물론 이도 경제적으로도 자식 키우는 것만큼의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야만 온전히 교감하며 그들이 주는 무한한 사랑과 에너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귀엽다고 들였다가 파양 하거나 유기하는 인간들에 대해 분노하는 편이다. (강력한 법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함)
하물며 덩치가 커다란 소들을 반려하다 명대로 살게 하는 일이란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일까? 양육(?) 비용이 더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