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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규 Jul 04. 2016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4년 간 에버노트를 쓰면서 변화된 것들

조선은 무얼 남겼나?

기록하는 행위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게 생각해 보게 된 건, 세종이 시행했다던 복지제도에 대해 듣고나서였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 때에 노비의 출산 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늘렸으며, 남편에게도 1개월의 휴가를 주었다대한민국은 2001년에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늘린 바 있다.

 

'지금', '여기'라는 맥락을 고려해서 생각하면,

당시의 그런 제도가 존경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품위가 흐르고 격이 있다.


이전에는 포착하지 못했던 감동을 느끼면서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살피던 중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의 허성도 교수가 소개한 조선의 힘에 대해 읽게 되었다.

글의 골자는 500년을 이어간 유일한 왕조인 조선의 힘은 기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도, 스핑크스도 없지만,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방대한 양의 기록이 유산으로 남았다.

기록을 통하지 않고서야 세종이 노비에 대해 가졌던 관점을 어떻게 알겠는가.

조선이 남긴 기록은 그 양의 방대함도 놀랍지만, 기록의 치밀함도 만만찮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왕이 출근하면 사관이 붙는다.

사관은 왕을 쫓아다니며 모든 것을 기록한다.

왕이 누굴 만났는지, 만나서 나눈 모든 대화를 기록한다.

왕이 언제 화장실에 갔는지도 적는다.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는다고 적는다.

이걸 오늘도 적고, 내일도 적고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쫓아다니면서 날려 적었기에 사관은 집에 와서 정서로 다시 쓰는 작업[사초]을 했다.

이러다가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로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해서 4부를 출판했다.

이렇게 나온 <조선왕조실록>은 분량이 6,400만 자로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이다.


국보 151호 조선왕조실록



분량을 보면 우리나라에 공식적인 <조선왕조실록> 전문가가 없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말고도 번역하는데만 80년이 걸린다고 추정되는 '승정원일기', 조선의 왕들이 바톤을 주고 받아 150년을 쓴 왕의 일기 '일성록'등도 있다.


 


사람들은 무얼 기록하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는다.

세종이 시행했던 복지제도는 기록되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개인 차원에서 남기는 기록은 어떤 모습일까?


최근에는 Doer안영일 대표가 천일동안의 일상의 기록을 소개하기도 했다.

천 일에 걸친 성장기록, 단상, 자신에 대한 관찰 등이 적혀있다.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참고할만 한 영감 넘치는 정성스러운 기록이다.

나눔디자이너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는 자신의 작업의 밑바탕은 메모에 있다고도 한다.

IDEA, 레드닷 등에서 수상을 하고   ID+IM 연구소를 운영중인 배상민 교수



기록은 업무나 명상에도 활용된다.  <기록형인간>을 쓴 이찬영 님은 블로그에 개인적 기록을 넘어, 업무와 명상노트에까지 활용하는 다양한 용도를 소개한다.


프랭클린 다이어리의 원천이 되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기록도 있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방대한 독서량과 기록 습관은 미국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지도자를 만들어주었다.


프랭클린은 스물 여섯에 기록을 엮어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펴내기도 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의 수첩에는 일상, 날씨, 생활 정보, 삶의 지혜, 좋은 글귀, 아이디어가 가득 적혀있다고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필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다산 정약용을 빼놓을 수 없다.

2주에 책 한 권 읽기가 어려운게 우리네 일상인데, 다산은 2주에 책을 한 권 씩 썼다. 그렇게 500권을 썼다.

다산은 생을 마감할 때 쯤엔 머리가 다 빠지고, 복사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기록에 혼신을 다했던 필사적인 필사(筆寫)였다.

 

그의 절박한 기록이 어떻게 책이 되었는지는 그의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을 보면 알 수 있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하고, 시간이 쌓인 뒤 기록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보완한 뒤 책으로 낸다.

-정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놀랍도록 간단한 이 원리로 머리가 다 빠지도록 기록한 게 책으로 엮여 500권이 되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을 잡아라. 먼저 모으고, 그 다음에 나눠라. 그런 뒤에 그룹별로 엮어 다시 하나로 묶어라. 공부는 복잡한 것을 갈래지어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다. 갈팡질팡하지 말고 갈피를 잡아야 한다. 교통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서랍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정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나는 무엇을 기록했는가?

3년 전 쯤, '지난 주에 누구랑 뭐했는지'를 떠올리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더듬더듬 기억해냈다. 분기/반기 단위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더 그랬다.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뭔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건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헨젤과 그레텔에게 필요했던 매개물이 나에게도 필요했다.


그 때부터 하루에 한 줄이라도 기록한다는 원칙으로 일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내용의 양과 질은 상관없이 그 날의 키워드, 만난 사람 이름, 사진 한 장이어도 좋으니 남겼다.

지나고 나니, 하루를 짧게 스케치하는 노트가 에버노트에 꽤 쌓여가게 되었다.

약 700일의 기록 / 오른쪽 숫자가 노트의 개수


(에버노트에선 초록색 폰트에 언더라인 표시는, 노트를 연결하는 기능을 하고, '노트링크'라 부른다.)


이렇게 기록을 짧게라도 하면서 돌아보니,

오는대로 쳐내는 일상이 아니라, 일상을 맞이한다는 생각이 켜졌다.

닥치는대로의 만남이 아니라, 소중함을 기억하는 만남이 늘었다.


"제대로 써내려 갈 수 없는 것은,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다"
- 데카르트



일상 말고도 다양한 걸 기록한다.

배움에 대해 기록을 해 오고 있다.

강의를 듣거나, 대화를 하다가 뭔가를 배웠다면 태그를 붙여둔다. 태그가 붙어있는 노트엔 녹음파일과 사진, 간단한 기록이 담겨있다. 그 간단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은 기억을 돌려준다.

뉴미디어아티스트 신기헌 님의 강의 @HoE
배움 태그가 붙어있는 노트




기록을 하며 변화된 건?

에버노트로 일상의 기록을 700여 개를 남기면서 굳은살처럼 남은 생각은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의 토대는 기록이고, 기록은 어떻게 기억할지의 문제를 결정한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대로이며,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다. 기록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실행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 형체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기록해야 눈에 보이고, 눈에 들어와야 행동할 근거가 마련된다. 흐릿한 생각에 실체를 부여해야 한다.


이 브런치 글을 떠올린 건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작성했다. 그나마 생각을 붙잡아 에버노트 남겨두었기에 완성이 될 수 있었다.


에버노트에 기록하는 것 이외에도 아나로그에서 기록도 많이 늘었다.

기록량이 늘어난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록의 성격별로 기록할 공간을 나눈 것에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노트에 다른 내용이 담긴다.

이렇게 성격별로 나누었을 때, 기록에 대한 추적이 쉽다.


(그 때 그 때 생각난 걸 마구 적는 노트)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적는 노트)


(힘든 일, 기쁜 일을 담는 일기장)





조직이론의 대가인 칼 와익 교수는 '작은 승리 전략'으로 불리는 작은 성공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뭔가를 차곡차곡 기록한 데서 쌓이는 유능감은 타인이 건드리지 못하는 내적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소할 수 있지만 그게 축적되었을 때 다른 일도 가능하게 한다.

평범함으로 위대함에 이르는 길은 기록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하면서 발견한 것들

기록하면서 얻게 된 몇 가지 작은 발견이 있다.

적어보기 전에는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형체가 없는 생각에 형체를 부여한 게 말과 글일텐데, 말은 날아간다.

들어서는 아는 것 같은데, 적어보면 빈 틈이 많이 보인다.  

적지 않고서 당시의 생각을 파악하는 길은 없다. 인상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 피드백을 하게 된다.

내적 자산이 된다.

과도한 정보소비의 시대에 생산자의 입장에 서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습관이다.


소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인간의 정체성은 생산을 통해 형성된다.
- <담론>, 신영복


하버드의 심리학교수 엘렌 랭어는 “처음 한 발짝 내딛고 나면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져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불쑥 충동적으로 시작한 기록이 쌓여가니 생각에 형체를 붙여보는 일도 재밌고, 실체 없는 생각에 뼈대를 심어서 실행해보는 일도 재밌다. 시도했는데 실패라는 값이 나오면, 또 기록한다.

그래서 기승전-기록으로 수렴하는데, 이게 삶의 작은 관성이 되었다. 대단한 것은 없지만, 이런 리츄얼 하나가 있는 것은 정신건강에 꽤 건강한 측면이 있어서 앞으로도 주위에 많이 권유하려 한다.



<에버노트 생각서랍 만들기>에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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