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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 코치 서민규 Jul 04. 2019

1,700일을 기록하면서 배운 것들


어쩌다 1,700일

몇 년 전, 공동창업을 했었다. 미팅과 회의는 잦았고, 물리적인 이동도 많았다. 뭐 하나 고정된 게 없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해보니 어제 점심에 먹은 게 기억이 안 났다. 곰곰이 하나씩 따져봐야 기억이 돌아왔다. 엊그제 만난 사람은 또 누구였는지 금방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앞둔 일정에 대해선 명료하게 주목했지만 남겨진 어제를 주워담을 시간이 부족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다보니 그랬나보다. 중심축을 잃어버린 팽이가 된 기분이었다. 젊은 치매도 걱정됐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그 날 뭘 먹었는지, 누굴 만났는지부터 3-5줄로 적기 시작했다. 그게 이어져 1,700일을 쓰게 됐다. 주요 분기점에서 잠깐 멈춰서서 돌아보면 남겨진 기록 그 자체보다 미처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암묵지가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올 해도 절반이 지났겠다. 혹은 절반이나 남았겠다. 한 번 돌아보고 싶었다.  

2017년 8월 19일, 1,000일 때 쓴 글과 비교해보면 그간 또 바뀐 게 많이 있다.  

(이전 글 - 1,000일을 기록하고 생긴 3가지 변화)

1,700일을 쓰면서 남긴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콘텐츠 소재가 충분해진다

1,700일을 기록해오는 동안 내가 하는 일도 많이 바뀌었다. 콘텐츠 코치로 내 일을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디자인하는 걸 돕고, 그 사람이 그걸 해낼 수 있도록 과정설계와 코칭을 하고 있다. 이 일의 핵심이라 여기는 부분 중 하나는 나 역시 내 콘텐츠를 꾸준히 발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판에 박힌 똑같은 하루보다는 풍부한 얘기를 꺼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때 1,700개의 데이터는 그 원천이 된다.


기록에 의존해서 당시의 생각을 더듬어볼 수 있다. 당시의 대화의 맥락이나, 중요한 미팅/레슨, 당시에 선명했던 내 생각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을 새롭게 바라보는 연습이 된다.

그렇게 콘텐츠 소재, 글감이 되어준다.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깜빡이는 커서를 막연하게 바라보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별 생각 없이 이전 기록들을 뒤적거리면서 글감을 발견한다.



2. 기록생산성이 높아진다

기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다룰 수 있는 기록의 양은 많아졌다. 필요한 걸 찾고, 꺼내는 시간도 단축됐다. 매일 짧게 하루를 정리하는 건 기록에 대한 기초체력훈련이다. 몇 가지 단축키를 활용해서 하루의 주요 이벤트, 생각, 발견한 것을 정리하고 나면 5-10분 남짓으로 끝이 난다. 드문드문 건너 뛰기도 했지만 1,700일을 이어서 진행해오니 기록에 대한 기초체력이 좋아졌다. 예를 들어 중요하다고 인식한 걸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서 시의적절히 활용을 한다거나, 용도에 맞는 기록관리라든가, 다른 사람의 중요한 말과 글을 시간이 지나서 내가 거꾸로 짚어주기도 한다. 다산이 말한 질서(疾書)는 달려나가는 생각을 놓치지 말고 적으라는 의미다. 중요한 생각을 낚아채는 습관이 많이 생긴 것 같다.


이 외에도 맥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도구를 함께 쓰고 있다.

dynalist - 만들려는 콘텐츠들마다 부여된 제작 프로세스 관리

scrivener - 종이책 원고 작성

workflowy - 책, 강의안의 목차 관리

bear - 기본적인 글감 관리

evernote - 보다 넓은 영역의 기록/스크랩 관리

devonthink - 각종 pdf, 책 스캔한 것들 (에버노트에서 조금씩 이주중이다.)


매일 짧게 기록하는 걸 포함해서 콘텐츠 제작을 위한 기록, 강의안 준비를 위한 기록, 스크립트 제작을 위한 기록 등 다양한 툴로 폭넓은 종류의 기록을 더 많이 소화하게 되었다. 기록생산성이 좋아진 배경엔 1,700일의 기록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3. 회고주기를 줄여준다

1,700일의 기록은 모두 에버노트에 했다. 에버노트를 여전히 쓰는 이유 가운데 큰 부분은 '링크'기능에 있다.

스마트폰의 기본 메모장은 스크롤을 통해서 이동하지만, 에버노트 안에서는 링크를 통해서 노트 사이를 오간다. 에버노트에서 링크를 만들려면, 다음 순서로 진행하면 된다.

노트를 2개 이상 생성

모든 노트 선택

우측의 '목차노트만들기' 클릭

'링크'가 포함된 새로운 노트 생성






이 방식으로 매일의 기록을 관리한다. 매 년 일기 노트북(폴더)을 만들고 월별 링크를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해의 월별 모음링크를 모아둔다. 몇 년 전, 특정 일자에 뭘 했는지 보려면 링크 몇 번이면 금방 확인할 수가 있다.




링크를 통해서 회고의 주기를 줄일 수 있다. 내가 상기해야 하는 것을 링크로 배치해서 마치 포털 화면을 브라우징하듯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회고를 1년에 한 번 하는 사람도 있지만, 회고를 하루에 3번 하는 사람도 있다. 회고를 하느냐의 여부만큼이나 회고의 빈도와 주기도 중요하다.



4. 새로운 분류체계가 있다

에버노트를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흔히 일기를 쓰면, 시계열적 사고(choronological thinking)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언제 뭘 했는지, 언제 어딜 갔는지. 이 기준은 나중에 기록이 쌓이다보면 불충분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연말에 회고할 때 나한테 의미있었던 날, 가족 행사, 기념일, 즐거운 대화를 나눈 날, 미팅이 있었던 날, 등의 특징에 의한 sorting을 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 어떤 주제어를 기준으로 1,700개의 데이터를 바라보면 시계열적인 데이터로밖에 가치가 없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정보로 남는다.


같은 종류로 데이터가 일정량 쌓이게 되면, 반드시 재분류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스크롤을 내리고 올리고 하는 비효율이 생기고 점점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이 때 TAG를 사용한다. 이걸 쓰면 새로운 차원의 분류가 가능해진다. 정보의 위계를 두 겹 이상 더 만들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처럼 각 연도별로 일기가 쌓여있다. 그러면 각 연도별로 시계열적인 기록을 돌아보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강의를 한 날"만 따로 모아보기를 하고 싶다면 그 날의 일기에 tag를 붙인다. '$deliver'라는 태그를 붙여둔다. 이렇게 하고 나면, 2017, 2018, 2019 각각 강의했던 날을 모아볼 수 있고, 전체연도에서 모아볼 수도 있다.



TAG를 1,700개의 일기에만 활용하는 건 아니다. 일상을 정리하듯, 독서내용이나 글감, 책의 소재들을 정리하는데 사용한다. 데이터를 대하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게 큰 소득 중 하나다.



5. 어제, 오늘, 내일에 대한 관점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고, 그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듯이 개인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그걸 들여다보면서 얻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기록을 하니 나 자신의 서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한 마디로, 과거를 읽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대응한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서 실패를 곱씹거나 변명을 찾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기록을 통해서 오늘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비추려고 노력한다. 거기서 좀 더 여력이 있다면,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고민해본다. 제한된 자원 내에서 어떤 주제를 학습하고, 어떤 일을 벌일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 게 더 현명할지,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적당할지, 어떤 분야의 책을 읽을지까지에 걸쳐서 주요한 참고서가 된다.



6. 혼자 일하는 사람의 유일한 질서

'혼자 조직'이 되어 일한지 2년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엔 어디로 출근할지, 누굴 만나야 할지 너무 고민이 됐다. 뭘 선택해야 할 것이며, 선택의 기준은 또 뭐란 말인가. 오늘은 어디 가서 무슨 생각을 할지, 내일은 또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그 막막함의 크기란 가늠이 안 된다. 공포스럽다. 퇴사를 한 사람들은 공감한다. 처음 1주일의 자유는 황홀하고, 다음 한 달은 고통스럽다. 혼자 조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기록'이 유일한 상수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기록만 남을 리가 없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기록을 남겼다. 뭘 해야 할지 모르면, 모른다고 남겼다. 시도했으면 시도했다고 남겼다. 변화가 찾아왔으면 찾아왔다고 남겼다. 이렇게 혼자 조직으로 발돋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건 담금질 과정이다. 기록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만, 기록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 혼자 조직인 경우 기록을 시작하고 나면, 머지 않아 변화에서 새로운 질서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 앞에서 혼자 조직이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질서가 기록이다.


하루 5분을 1번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이건 한 가닥의 실 같다. 당기면 끊어진다.

하루 5분을 1,700번 쓰는 건 조금은 어렵다. 1,700가닥의 실을 꼰 것과 같다.


"자신의 사유를 수중에 간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써서 기록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을 독서해야 한다”  --에픽테토스





서민규 / 콘텐츠 코치

세 편의 콘텐츠를 만들었고, 이 경험을 녹여 오리지널 콘텐츠 공방 GX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면서 자기만의 콘텐츠가 필요한 분들을 돕고 있다. 에버노트를 학습도구로, 워크플로위를 기획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을 대학교, 교육기관, 기업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콘텐츠매터스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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