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언제부터 여름이었을까. 그토록 싫어하던 여름을 좋아하게 된 때가 언제더라.
학생 때 나는 대다수가 그렇듯 연예인, 특히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출연 유무와 상관없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연달아 방송하는 음악방송들을 숙제보다 더 열심히 챙겼다. 학원 버스가 집 앞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2009년의 어느 날에 너를 보고 심장이 쿵쿵 울렸다.
내가 좋아하는 곽민지 작가의 에세이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친구 Y는 덕질을 두고, "초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사진 한 장 보는 것만으로 1초 만에 내 기분을 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라고.' 이 책의 말을 빌리면 나는 중학생에 이미 초능력자가 된 것이다.
너희가 노래 제목만 들어도 민망해하는 <Mytery>라는 노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머리에 음악이 재생되고 있을까? 어깨가 잔뜩 솟아있는 다소 요상한 슈트에 노래 내내 끊임없이 목을 돌려대는(!) 그 무대를 나는 무던히도 사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음악방송을 보며 내가 너의 이름을 끊임없이 외쳐댈 때면 동생은 '그 이름 좀 그만 불러.'라고 질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으니까.
분명 호감의 시작은 외모였으나 좋아하는 마음은 물에 한 방울 떨어진 잉크처럼 어느새 퍼져만 갔다. '난 절대 너의 얼굴만 좋아하겠어.'라고 정해도 절대 지킬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마음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숙명. 으레 그렇듯 너의 모든 것이 좋아졌다.
철없던 시절, 나는 당연하게도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 앨범을 사고, 너희가 광고하는 제품은 꼭 사고 음식은 열심히 먹었다. 음악을 불법 다운로드해서 듣던 시절에도 너희의 음악은 음원사이트에서 꼭 결제해서 들었다. 뮤직비디오는 너무 많이 봐서 장면을 다 외울 정도였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어릴 때 나의 엄마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어느 날은 너무 심하게 싸워서 그릇이 깨진 적도 있었다. 둘의 고함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방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다음 너희의 무대 영상을 봤다. 그러면 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소리를 제일 크게 하면 처음엔 귀가 먹먹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무대를 보는 그 3분 동안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물은 줄줄 흘리면서도 내가 도망갈 곳은 그곳이 전부였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나에겐 있었다. 단 3분 동안이었지만 나에겐 30분처럼 느껴졌던 낙원.
팬카페나 SNS에 콘서트나 팬 사인회 후기가 올라오면, 나의 이 기막힌 현실을 한탄하며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 안 보면 될 텐데, 부러워하면서도 꾸역꾸역 모조리 다 읽었다. 나는 어리고, 돈이 없으며, 지방 소도시에 살아서 저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저주하면서. 나도 이 넘치는 사랑을 말해주고 싶은데. 이런 곳에서도 너희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나 자신보다 너희를 더 응원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대학생 때,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잠을 못 잘 때가 있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누가 볼까 봐 꾸역꾸역 긴 팔 상의에 긴 바지를 입고 다녔고, 하루종일 간지럼에 시달렸다. 신기하게도 밤에는 더욱 심해져서 진물이 날 때까지 피부를 긁었는데, 해가 뜨면 각질 비슷한 흔적들이 이불에 가득해 있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니 당연히 예민함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는 엄마 아빠가 그릇을 깨며 싸울 때보다 더 많이 울었고, 처음으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해가 뜨고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갔다. 과제도 하고 시험도 쳤다. 이런 나 자신에게 치를 떨었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너희는 새로운 노래를 냈다. 그러면 또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고, 일주일을 살아내고, 한 달을 살아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위로받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를 채워주었다.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오롯이 받을 수 있는 어떤 것. 나는 지금도 너희가 나를 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팬과 가수의 관계라는 게 마냥 좋아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참 어렵더라. 그도 그럴 것이 이것도 인간관계라, 일방적이면 지치기 마련이다.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는 묘한 순간들이 중요한 관계. 너무 다 줘서도 안되고, 너무 주지 않아도 안 되는 관계. 너희를 좋아한 지 14년 째인 지금도 나는 참 어렵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어렵겠지.
오랜 시간을 좋아하다 보니 이젠 너희가 없는 나를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해마다 차곡차곡 써 온 일기장 속 가득한 너희의 이름, 책꽂이 한 칸을 가득 채우고도 한참 남은 앨범들, 좋아한 세월에 비해 몇 장 되지 않는 티켓들, 같은 걸 몇 번째 저장하는지 모르겠는 사진들, 힘들 때마다 펼쳐보던 내 이름이 적힌 유일한 싸인 앨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얻어낸 포옹, 지독하게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구필수는 없다> 보조출연까지.
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당사자가 모르는 내 존재가 의미가 있는지. 내가 아무리 열렬히 사랑해도 그들은 모를 텐데. 답이 없는 편지를 보내고, 받지 않는 전화를 끊임없이 거는 그런 기분. 혹여나, 아주 혹여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길까 불안한 마음.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을 하기엔 너희에게 받은 게 너무 많다. 내가 준 것이 있고 그만큼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
너의 잘생긴 얼굴도 좋지만, 노래하는 특유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좋다. 담백하고 힘 있는 춤선이 좋다. 쌍꺼풀 없는 다부진 눈매가 좋다.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좋다. (최근에 없어진 것 같아서 조금 슬펐다.) 군대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보니 월요일이 너무 힘들었다며, 월요일마다 인스타그램을 올려주는 모습이 좋다. 콘서트에서 관객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이 좋다.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나까지 축구를 좋아하게 된 점도 좋다. 머리를 자주 만지는 모습이 좋다.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거나 어깨에 손을 얹는 버릇도 좋다. 예쁜 글씨체도 좋다. 포켓몬 1세대 이름을 죄다 외워서 줄줄 나열하는 모습이 좋다. 여행에 진심인 모습이 좋다. 혼자 영상 편집을 배워 유튜브에 올려주는 모습이 좋다. 겉은 강해도 속은 누구보다 여린 모습이 좋다. 조카와 함께 있는 모습이 좋다. 영화를 보고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좋다. 가끔 술에 취해 늘어놓는 취중진담도, 장난치는 모습도, 예의 바른 모습도. 멤버들이 전부라던, 원동력의 80은 팬이라던. 사실 그냥 너라서 좋은 거겠지. (이렇게 나열해 놓으니 좀 무섭나.)
그래서 지금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냐고? 그렇지 않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 나의 감정은 사랑이다. 의미만 달라졌을 뿐이다. 누군가는 '빠순이'라며 비아냥댔던 그 행동도, 사랑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너희를 많이 좋아하고, 너희를 좋아하는 나의 모습도 좋아했으니까. 일기장을 가득 채울만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사랑이지. 다만 연인이나 가족, 친구와의 사랑과는 또 다른 형태라고 이름 붙이고 싶을 뿐이다.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준 존재. 사랑과 존경과 우정,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것. 너희를 보면 떠오르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벅차오름 같은 것.
여름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게, 여름을 이겨낼 단 하나의 이유는 너의 생일이다. 7월. 나와 같은 달, 비슷한 시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너는 나의 여름이다. 오늘도 마음이 넘쳐 흘러가버릴까 글로 꾹꾹 담아낸다.
* 편의상 반말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