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생 김나영이 부모님께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영화는 소설보다 날카로운 느낌이 덜했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정서를 담은 영화였다. 남자를 나쁘게 그린 영화도 아니고, 여자를 특별히 불쌍하게 그린 영화도 아니었다. 82년생 지영의 이야기이자, 어머니의 이야기고, 워킹맘 선배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연령대 여성들의 이야기라 매우 공감이 됐다.
나는 빠른 84년생이다. 14개월 먼저 태어난 82년생 오빠와 함께 자랐다. 오빠보다 사교육을 덜 받긴 했지만 이건 첫째와 둘째의 차이지, 부모님이 여자라 차별해서는 아니었다. 오빠가 부모님의 실험 대상 1호라면 나는 2호였다. 오빠는 공문 수학, 플륫, 윤선생 영어교실, 피아노, 태권도, 미술, 글짓기, 영어 말하기 등을 배웠고 나는 그중에서 공문 수학, 플륫, 윤선생 영어교실, 피아노, 미술을 배웠다.
부모님은 나와 오빠를 정말 공평하게 키우셨다. 피자 한 판을 시키면 정확히 반을 나눠 주셨고, 새 옷은 공평하게 둘 다 안 사주셨다. 용돈도 똑같았다. 가끔 엄마가 오빠를 더 예뻐한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그건 샘 많은 둘째의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오빠에게 정말 공평한 사랑을 주셨다.
"나대! 막 나대!" 지영의 어머니가 딸에게 건네는 파이팅 넘치는 대사다. 얌전히 있지 못하고 촐랑거린다는 뜻의 '나대다'가 이렇게 씩씩하고 따뜻하게 들릴 수 없었다. 육아에 시달리는 지영이 그래도 꿋꿋하게 자기 몫을 해내며 사는 것은 건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지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어딘가에 귀속되는 삶을 살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자유롭게 나대며 살라는 충고가 전부였다.
영화를 보면서 부모님 생각이 참 많이 났다. 25살에 다니던 잡지사가 경영난을 겪으며 갑자기 백수가 됐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 집에서 만 19세 넘은 성인이 밥벌이를 못하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는 걸... 우리 부모님은 집에서 노는 내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셨다. 너는 왜 원대한 포부가 없니, 글을 쓸 거면 작가가 되어야 하지 않니, 이럴 때 절치부심해서 시험 준비라도하지 그러니... 시집이나 가라는 잔소리가 오히려 듣고 싶었다.
부모님의 원망과 비난 포인트는 나의 '목표 없음'과 '포부 없음'에 쏠려 있었다. 그때 한창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 빠져 계셨던 아빠는 "너는 왜 김수현처럼 글을 못 쓰냐!"라는 망언까지 하셨었다(아빠 전 재능이 없어요...). 8개월간 집에서 놀고먹으며 가장 불안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에게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위로를 해주지 않으셨다. 어서 나가서 일하라고, 교육받은 만큼 사회에서 네 가치를 인정받으며 살라고, 두 분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달달 볶아대셨다.
결혼을 하고 워킹맘이 된 지금은 그런 부모님께 너무나 감사한다. 아이 키우는 일에 함몰되지 말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결같이 쪼아대는 부모님이 정말 고맙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이유는 아이는 우리가 책임지고 잘 돌봐줄 테니 맘 편히 일하라고 등 떠밀어 출근시키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막 나대야지, 회사 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속으로 결심하며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