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여적여’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여자의 적은 여자. 수많은 매체와 일반인 사이에서 쉽게 오가지만 실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반론일 뿐이며, 앞으로 없어져야 할 수많은 쓰레기 말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만약 저 말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견제하고 파벌을 이루는 어떤 관계를 칭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 말이 튀어나온 세계는 한쪽 성별에만 해당하는가? 시기와 질투와 견제와 힘겨루기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인간 본성의 수많은 감정과 특성에 대한 의견은 쉽게 일반화하기 전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가 제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는 게 먼저여야 하지 않는가, 이 말이다.
인간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부분도 여성들에게는 더 큰 굴레로 활용돼 왔고 ‘여적여’는 가부장제 사회를 더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덧씌운 수많은 억압과 스스로를 옭아매도록 종용하는 우스운 비하의 틀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주의가 새롭게 주목받는 지금조차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여전히 높다. 여성보다 훨씬 나은 급여를 받는 대신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 크다는 사회적 인정 덕분에 남성에게 ‘가정’이 편히 쉬어야 할 최후의 보루로 작용하는 동안, 일하는 엄마들은 퇴근하자마자 ‘또 하나의 직장’인 가정으로 출근해 남은 집안일을 감당하며, 온종일 집안일과 독박 육아에 시달리는 주부들 또한 아무리 힘을 들여도 티도 나지 않는 가사노동의 최전방에서 무일푼 노동을 이어가야 한다.
일하는 엄마들과 주부들은 육아와 가사노동에 ‘보조’가 있느냐 없느냐로 서로의 불행과 행복을 저울질하는 신경전을 치르고 그 성과를 비교당하기 일쑤인 통에, 비혼 여성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기혼 여성들을 바라보는 복잡 미묘한 눈빛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 복잡한 현상을 나타내기에는 ‘여적여’ 따위의 말은 충분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경우가 훨씬 많으며 (인권 의식이 부족한 남성들이라도) 누구든 함께 아우르고 가려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들들 볶이는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웬만하면 모든 불합리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혼자서는 불만을 표출하고 소리 높여 싸워봤자 그 변화가 소소하거나 너무 더디고, 당장 눈앞에 쌓인 문제를 해결해야 그 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다는 점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제 소리를 내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넘어가면 오늘과 다른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 등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나 인권 사각지대의 여성들을 위해 싸우는 시민단체들만 세상의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겪는 불합리함을 타파하기 위한 작은 목소리부터 거국적 사회 운동까지 모든 여성운동은 서로의 연장선상에 있다.
1908년 ‘세계 여성의 날’의 기폭제는 불평등한 환경에 입을 다물거나 가만히 있지 않고 싸우기를 선택한 여성들의 연대였다. 노동 현장 화재로 사망한 동지들을 기리며 뭉친 2만여 명의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차별받던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투표권 등을 요구하며 궐기했다. 이듬해인 1909년 미국에서 ‘전국 여성의 날’이 선포되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여성운동가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 독일)이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함으로써 정례화 되었다.
여성주의가 시끄럽고 불편하며 결국 여성‘만’을 위한 반쪽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여성들이 (너무 감정적이라고 세상이 함부로 치부한) 타고난 공감 능력을 통해 하루하루 쌓이는 공염불의 침묵을 깨고 세상과 손을 잡아 눈을 뜬다면 모두가 함께 사는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좀처럼 싸우지 않고 모든 불합리함을 조용히 참으며 스스로 해결해 온 여성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속에 쌓인 말들이 많지 않느냐고, 그 말들을 꺼내 서로 모두면 좀 더 나은 해결책이 있지 않겠느냐고, 혼자서는 약해도 여럿이 함께하면 그 힘은 그 어떤 것보다 무궁무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