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저 사람은 왜 저따위로 말을 하지?'
참 오랜 시간 불편한 나르 상사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할 때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래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야 옳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나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한 일 같다. 그게 이해의 출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왜일까?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상대방을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답 없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져 가야 할 내 인생이 쓸데없는 고민들로 채워지거나 훼방받을 이유가 전혀 없기에 그렇다. 우리는 그런 사소한 걱정보다 스스로 찾아가며 나의 소중한 인생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데 더 높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집중하기에도 이 세상의 시간은 한없이 무한하고 빠르게 흘러간다.
어제의 반복은 오늘이 될 수 없다. 오늘은 오늘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새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것만큼 나를 괴롭히는 어리석은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솔직한 고민은 이것이다.
눈을 감으면 자꾸 과거로 끌러가고
눈을 뜨면 불안한 미래에 숨 못 쉬고
모든 날들이 현재의 방황 속에 있다.
이 고민이 어디에서 온 걸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불안이 매우 높은 성격이었고 이 불안을 다스릴 방법을 몰라 오래 아팠고 사실 지금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나와의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다.
근데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원인을 찾고 발견한다고 해서 내가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 원인을 알아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문제를 예방할 수도 없고 원인을 차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원인을 찾아 과거의 아픔을 깨달아도 그 시절을 바꿀 방도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사는 것이고 이 현실 속에서 앞으로 나에게 닥칠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목적을 찾으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답을 찾기 위한 여정에는 과거의 아픔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아닌 실제로 현재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찾아 나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어야 하는 마음은 걱정과 염려가 아닌 용기뿐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를 얻는 법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보다 평범을 추구한다. 이런 마음을 얻게 된 데에는 나의 성장 배경이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어릴 때부터 항상 주목받는 환경에서 자랐다. 일란성쌍둥이였고 노래를 잘했고 동생과 눈에 띄는 똑같은 옷을 입고 선생님들께 항상 칭찬받고 예쁨 받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 내가 모르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나 스스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늘 관심과 주목을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적어도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못난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강박이 늘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생각이지만 이것이 필요 이상으로 나를 괴롭히고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만들기도 해서 매사에 자연스럽기 어려웠고 쓸데없는 콤플렉스가 이유 없는 불편함처럼 평범함을 빼앗았다. 그것은 내게 불안이라는 장벽을 쌓게 했고 그 역시 움츠러들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나를 저평가하게 되고 스스로에게 열등감을 던지는 마음으로 잡아 끌어내리고 말았다.
평범한 자신감
살면서 의외로 부모님께 잘 듣지 못했던 표현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 또는 '잘했다'는 칭찬도 거의 듣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듣기 힘든 말은 바로 '고맙다'는 말이었다.
나는 열등감이 심한 아이라는 걸 늦게 알았다. 어릴 때 종종 부모님의 말다툼에 잠에서 깨어 밤 새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숨죽여 불안과 맞서 싸워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의 두려움은 고막을 찢을 듯한 아빠의 쉰 목소리도 아니었고 평소와 너무나도 다른 엄마의 거친 대응도 아니었다.
그저 저 두 분이 왜 저렇게 큰소리로 이 새벽,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말다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끝없는 논박의 결말이 과연 누구에게 유익할까? 이런 생각은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나 스스로를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것 같은 위험한 상상 속에 나를 밀어 넣어 버렸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화두는 언제나 '쌍둥이 쟤네 당신이 감싸고 도니 애들이 저 모양'이라는 둥, '나 때는 한 겨울에 새벽에 일어나서 집 앞 비질도 하고, 아버지 구두도 닦고, 게으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당신이 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고생 안 시키고 키우니까 애들이 고생을 안 하려고 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교육방식에 대한 불만이 아버지에겐 그저 답답하고 못마땅한 이유였고 그 주제는 두 분의 싸움에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 같았고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나 하나만으로도 이미 죄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뭔가를 잘해야 칭찬받을 수 있고, 잘 보이기 위해 애써야만 부모님의 다툼이 그나마 줄어들 것 같았다. 이 같은 현실은 어린 나와 내 동생에게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 성장한 한 인간을 바보처럼 가스라이팅 시키기에 충분했고 소시오패스에게 쉬운 멋잇감으로 작용했으며 나르시시스트에겐 이용할만한 가치가 매우 충분한 나약한 한 인간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존재의 기쁨
무엇을 잘해서, 잘했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것이 아니라 나와 내 동생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부모의 기쁨과 감격이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의 기준과 시끄러운 수많은 규칙들 안에서 칭찬받을 수 있는 잘 조련된 훈련견이 아니라 이미 존재의 기쁨 그 자체라는 것을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게 거듭 전달하고만 싶다.
이유 있는 존재의 기쁨이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존재만으로 너는 특별하고 귀하고 소중한 아이란다.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고맙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그런 고마움의 표현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고 그 텅 빈 감정은 마른 장작처럼 불같은 언어의 지옥 속에서 메말라 타버리고 검은 상처만을 남긴 채 잿더미처럼 무너져 버렸다.
나는 학생들을 오래 가르쳐왔고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버릇없는 학생들의 모습이나 교복 입은 아이들의 일탈 행동에 대해 평소 못마땅해하거나 꼰대 같은 기질이 잠시 있었다. 그런데 이런 별로인 내 모습이 바뀐 시점이 있는데 바로 '세월호 사건'이 그 계기였다.
그 당시 세월호 사고를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접하고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을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고 먹먹한 마음 때문에 목이 메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눈물이 흐르는 경험을 했다.
그 이후로 길을 걷다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 자체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아... 저렇게 밝고 어린아이들이 그런 고통 속에 죽어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픔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고 지금 이 날까지 학생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 늘 고맙고 귀한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영원히 변함없다.
네 탓이 아니다
- 죄책감 벗기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머리로 안다. 근데 어느 순간 나는 이것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숨이 막히고 손발은 저리고 차가운데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시야가 흐려지고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필요시' 약을 처방받기 전 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자주 했고 처음엔 이것이 심장이나 혈관계 이상에서 오는 적신호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공황장애' 증상이었다.
만약 내가 흡연자라면 폐암에 걸릴 경우 담배 피운 순간들을 탓하며 죄책감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황발작 또는 이 공황증상은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혹은 나로 인해 벌어진 이슈가 아니다. 물론 마음 상태가 흐트러져 있다는 둥, 정신력이 약하다는 식의 훈수를 두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충고를 안 들어 본 것도 아니다. 이제 이런 꼰대 같은 오지랖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하염없이 구겨진 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안 그러면 밟혀 죽을 것 같은 벌레만도 못한 나약한 나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아서 주위를 둘러싼 공포감 외에 그 어떤 것도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내가 무언가 잘못했거나 내가 한 행동의 인과관계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가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무기력한 내 모습의 결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볼 때에 밀린 집안일들 때문에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괜찮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 종종 온다. 그런 날 나는 몰아서 이 일들을 해치운다. 그리고는 또 2~3일을 끙끙 앓아누워버리지만 그것도 괜찮다. 다 괜찮다. 모두 괜찮다.
힘든 하루를 꾸역꾸역 지내온 나에게 나는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정말 오래 힘들어하는 누군가 있다면 우린 모두 스스로 참 대견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미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많이 아팠고 잘 참고 지내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진심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참으로 영광이고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당신이 무사히 지나간 오늘 하루는 선물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될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바란다.
잘 자,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