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꼬창에서 느슨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한 티베트 불교의 철학
가치 있는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물질에 대한 과몰입보다는 영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하더라도 너무 현대적인 곳이 아닌 개별의 고유성을 간직한 독특하고 이질적인 곳을 소구 했다. 그들의 문화와 전통적인 삶으로부터 시각적, 후각적, 미각적 그리고 청각적인 충격을 받고 싶었다. 그야말로 행복의 충격을 욕망했다. 첨단의 디지털은 너무 뾰족하다는 나의 편견이 아로새겨 있었기에.
그런 여행지를 찾다 보면 이 '라다크'라는 음유시인의 싯구같은 이름과 결국은 만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서구화의 폐해, 경각심, 자연 생태, 환경 파괴, 지구온난화, 공생 등의 키워드가 아닌 그저 생경한 문화에 대한 동경 그리고 그곳을 여행하고픈 열망으로 읽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조정되는 운명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는 불교에서처럼 개인적 성장의 여지가 없어 보였어요. 우리는 영적 수련을 통한 내적 성장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page 156)
이 책을 들고 태국의 꼬창으로 떠난 적이 있다.
태국의 꼬창 Koh Chang이라는 이 조용하고 우리의 옛 과거로 회귀한 듯한 덜 인위적인 곳에서 읽기에 이보다 더한 책은 없었다. 물론 라다크에서 읽는다면 내 삶의 더없을 축복이 되었겠지만.
짠내를 품은 후끈한 남국의 바다 내음, 레몬 그라스 고수의 아릿한 허브 내음, 피쉬 소스 아니스의 시큼한 향신료 내음... 그렇게 과거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후각'으로 기억된다.
라다크는 어떤 냄새일까?
불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염세주의를 조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지함 '감각과 선입관에 의존하는 세상의 경험'으로 인해 사물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일상세계 너머의 영속성을 보지 못한다. 계속 그런 무지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존재의 굴레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계의 실체를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시각을 바꾸려는 것이다 (page 137)
어느 새부터 인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로 회자되던 곳, 인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잠무카슈미르 주에 위치한 라다크는 중국, 티베트,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여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74년경에야 외부에 개방되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신들의 산에 솟은 사원의 흰 벽, 척박하게 메마른 땅, 거칠게 깎아 내려진 끝을 알 수 없는 협곡, 염원을 담은 깃발과 기도 소리... 그리고 이제는 이웃한 중국, 파키스탄과의 분쟁으로 총성이 울리는 곳.
행정상으로만 인도에 속해 있을 뿐, 라다크는 인도 라다크가 아닌 "그냥 라다크"다. 역사적으로도 라다크는 아주 오래전에는 티베트의 일부였으며 기원전 200년경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후 라다크에 있는 모든 것에 반영이 되어 있다. 아찔한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회벽의 불교 사원 '곰파'와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 깃발 타르초는 또 하나의 경전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바람이 불경을 세상에 전한다고 믿었다. 신앙에 서린 낭만이다.
존재에 대한 라다크 사람들의 개념은 윤회, 다시 말해 멈추지 않는 반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번 인생이 유일한 것이라는 관념은 없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것은 끝이기도 하지만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탄생에서 다음의 탄생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뿐이며 최종적인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는 명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원의 영역 밖에서 깊은 명상이 행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들은 꽤 많은 시간을 준명상의 상태에서 보낸다. (page 168-169)
어둠과 고요 속에서 짙은 향내와 함께 "This is what death is. (이것이 죽음이다)"라는 음성이 울린다. 묘실처럼 네모난 어두운 공간, 바닥의 잿더미 위로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이 보았다는 빛의 환상을 영상으로 비춘다. 그리고 [티벳 사자의 서]를 낭독하는 초월적 목소리.
이 작품은 2020년, 남산에 위치한 피크닉 Piknic의 전시 [명상 Mindfulness] 중 첫 번째 주제인 '죽음과 함께하는 삶 Being with Dying'을 다룬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의 <바르도>이다. 바르도 Bardo는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계'를 뜻하는 티벳 불교 용어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사후 즉시 영혼인 의식이 여행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바르도의 세계이다. 차웨이 차이는 불교의 공空의 개념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예술 세계를 추구한다. 바로 라다크의 삶이다.
이렇듯
라다크의 장례식 절차 중에는 티베트 불교의 관습에 따라 장례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사자의 서 死者書]를 읽는 순서가 있는데 승려 한 사람이 찾아와 직접 읽어주면서 죽은 자의 영혼에게 내세의 경험들에 대해 알려주는 것과 함께 악령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순수한 하얀빛, 즉 불교에서 말하는 '청명한 허공의 빛'을 향해 나아갈 것을 주문하다.
"투씨 로마 tussi loma, 투씨 로마.....(가을에 지는 나뭇잎 같이...)"
친구를 떠나보내거나 소중한 것을 잃을 때는 불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 (page 169)
느슨하고 여유로운 시간,
여기 꼬창 Koh Chang에서도 라다크 Ladakh에서처럼
이렇게 꼬창의 화이트 비치에 오렌지빛 미묘한 어둠이 스며들 때면 실은 모든 게 무상한 게 아닐까...라는 현실을 떠난 짙은 허무의 상념 그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내 욕심으로 키워버린 일에 대한 스트레스, 기대라는 쓸모없는 감정으로 키워버린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 그것들을 피해 오롯한 혼자만의 사색이란 거창한 미션을 부여했다 해도, '나'라는 이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실체는 결국 다른 이들과 유대를 맺고 연결되길 원하고 만다. 그렇게 10여 일의 자발적인 고독이 끝나가고 있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 무엇인가가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또 자신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연결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라다크 사람들의 그런 확고한 자아의식은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page 174)
이 헬레나 노프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는 과거 라다크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발이냐 전통으로의 회귀냐라는 이분법적 편협한 사고가 아닌, 개별의 문화적인 토양 위에 생태적 가치와 공동체 가치 실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개발이라는 것이 꼭 파괴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서구화적 발전을 반대하는 것 또한 이미 그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의 오만이고 욕심이다. 그러한데.... 몇 년 사이 파괴적으로 변해버린 지구의 날씨 앞에서는 사실 막막하기만 하다.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게 약속한 '손실과 피해' 지원 기금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어서 이루어져 모든 국가 그리고 이 지구의 모든 생명이 다 함께 잘 '공생'할 수 있음 좋겠다.
이미 다가온 여름에게 공포감이 아닌 총천연의 나른함으로 설레이고 싶다. 예전처럼 두 눈 가득하게.
책을 읽는 내내 하나의 시간에 낯선 두 공간(꼬창 & 라다크)을 동시에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두 곳, 확연히 이질적인 토양이지만 묘하게도 닮아 있다. (후지와라 신야는 [동양방랑]에서 티베트는 '광물의 세계'로 동남아시아는 '식물의 세계'로 서로 근본의 다름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이 표현 곱씹을수록 뭔가 시적이면서 과학적이야!!!) 어쩌면 아날로그적인 색채의 삶을 막연히 동경하는 나의 관점 때문 일거다.
자발적인 고독처에서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탐욕스럽게 일에 대한 욕심을 냈고, 그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나의 무능함에 좌절했으며 버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집착, 소유욕...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꺼내본 이 책 군데군데 지난 나의 기록들이 그렇다고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라다크 사람처럼 사랑과 우정에 격정적이거나 집착하지 않는 건강한 유대관계를 꿈꿔본다. 누군가가 바르도에 들어선 나를 향해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주는 순간, 그 죽음의 순간에 '이만하면 참 잘 살았다'라고 자축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