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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2. 2024

점멸하는 기억, 사무치는 그리움

영화 <애프터썬>(샬롯 웰스,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프터썬>(샬롯 웰스, 2023)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야기의 조각들이 어렴풋이 맞춰지면서 애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분명 아름답고 따뜻한 장면들의 연속이었는데 그 끝이 가슴 절절하다.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듯 영화를 되짚어보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이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었음을, 영화의 주인공 소피처럼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 뒤늦은 인식과 이후의 긴 여운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20년 전 여름, 십 대 소녀 소피는 아빠 캘럼과 튀르키예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캘럼은 자신의 서른한 살 생일 즈음에 딸과의 여행을 계획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푸른 바다, 여유로운 리조트.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아빠와 딸의 소소한 추억이 나열되는 영화는 별다른 이벤트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피가 아빠보다는 주변의 또래에 더 관심을 두고 있고, 캘럼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게 이상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캘럼은 발코니 난간에 올라가 위태롭게 서 있기도 하고,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고 힘겹게 숨을 쉬기도 한다. 밤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오열하기도 한다. 딸에게 감추고 있던 그의 내면은 짐작건대 깊은 우울감과 자살 충동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이 당시 아빠의 나이와 같은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은 소피가 회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때가 소피가 기억하고 있는 캘럼의 마지막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해 여름은 아빠와 딸이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이다. 공항에서 소피를 배웅한 이후 캘럼은 딸에게 사랑의 메시지가 적힌 엽서를 남기고 아마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듯하다.  



   "약간 우울한 것 같아. 그냥... 그런 기분 있잖아...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몸에 힘이 없고 그냥 다 지쳐서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야." 


   이 대사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지친 소피가 침대에 늘어지듯 누워서 하는 말이다. 캘럼은 화장실에서 무심한 듯 딸의 얘기를 듣고 있다. 소피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거울에 비친 캘럼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다. 자신의 속마음을 딸에게 들킨 것 같았을까? 어쩌면 딸과의 꿈같은 여행을 보낸 후 캘럼의 심정이 저랬는지도 모른다. 근사한 나날을 보내고 혼자가 되었을 때 돌연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캘럼과 소피의 여행이 우울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아빠와 딸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서로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는다. 여행 중에 캘럼은 소피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어 했다. 술과 댄스, 그리고 호신술까지. 아마도 자신이 없더라도 딸이 스스로를 지킬 줄 알기를,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소피도 캘럼에게 기억에 남을 감동의 순간을 안겨주었다. 캘럼의 생일 아침, 소피는 사람들을 모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마지막 여행의 기억 속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현실의 소피가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린 건 꿈 때문이다. 꿈속에서 소피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멈춘 캘럼을 본다. 어두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듯했던 그는 알고 보니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소피가 그를 붙잡아 껴안는 순간 캘럼은 심연으로 멀어진다. 소피의 꿈에는 당시 아빠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던 딸의 안타까운 심경이 녹아 있다. 점멸하는 기억 속 아버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관객의 마음을 울리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다.                    


                                                       

<애프터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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