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2025년 4월 2일

by msg


"우리가 서로의 눈을 통해 한순간이라도 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2025년 4월 2일


약속된 주간 보고 시간이었다. 현우는 온라인 미팅 링크에 접속했다. 화면 너머로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난번 시한부 고백 직후의 당혹감은 사라지고, 대신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호기심이 얹혀 있었다.


"강 작가님, 이번에 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박진태 대표가 먼저 운을 뗐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너스레 대신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젊은 세대의 사랑이라기에 마냥 풋풋할 줄만 알았는데, 그 안에 담긴 현실적인 고민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젊은 시절 부끄러운 제 모습을 거울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하윤이라는 인물이 어떤 배경에서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된 건지, 그리고 그 대화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어쩜 딱 거기서 끊으셨는지, 역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현우는 예상했던 반응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화면 너머의 두 사람을 보며 잠시 과거를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카메라를 응시했다.


이제 그가 풀어놓을 이야기는, 그날의 현우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자신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던, 숨겨진 하윤의 내면이었다.


2018년 여름, 그날의 대화 이후.


현수의 '팩트 폭행'은 현우의 고지식한 이상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아이고 형님. 모든 사람이 당신 같지가 않아요.' 현수의 말은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래, 나는 그녀에게서 내 방식의 완벽함을 요구했구나.'


그는 뒤늦게 깨달았고, 그날 밤 자신의 편협함을 자책하며 잠 못 이루었다.


그때 현우가 온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던 하윤의 내면에는, 그녀만의 단단한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하윤이 '안정'을 말했던 이유는 단순히 물질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재능의 한계를 일찍이 직감했다.


스무 살 초반, 현우만큼 '밤낮없이 글에 미쳐' 달려본 하윤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우만큼의 타고난 재능과 집요함은 없어. 나는 글을 쓰는 게 좋지만, 현우처럼 미친 듯이 작품에 매진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낼 정도의 예술가는 아니야.'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불확실성을 부모의 경제력이라는 안전망 위에서 체험해 온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자기 회의가 하윤의 내면에 서서히 자리 잡았다.


'내가 이룬 성과들이, 사실은 돈에 의해 보정된 것이 아닐까?'


그 모든 특권의 무게를, 그녀는 해외여행 한번 못해본 현우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현우의 얘기를 들을수록 그녀에게 '돈'은 단순히 부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이자, '미래를 위한 안정적인 발판'이었다. 현우의 눈에 ‘꿈보다 돈’으로 보였던 그녀의 가치관은, 사실 ‘꿈을 지속하기 위한 가장 단단한 발판’이었던 셈이다.


하윤은 그 다툼 이후, 현우의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치열하게 이어갔다. 그녀는 현우에게 '네가 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내가 현실적인 기반을 마련해주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부담스럽지 않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날 현우는 '다음 주 주말에 봐. 어제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 하고 답장을 했다. 일주일 뒤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역력했다. 현우가 마지못해 먼저 사과로 대화를 열었다.


“미안해. 갑자기 물어봐 놓고 혼자서 난리 쳐서.”


“괜찮아. 네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는 대충 알아. 하지만…” 하윤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쥔 손바닥이 축축했다. “네가 무섭기도 해. 네 말은 언제나 틀리지 않잖아. 빈틈없는 논리 앞에 서면, 내 감정은 설 자리를 잃는 기분이야. 내가 솔직하게 말하기가 더 어려워.”


“그… 내가 좀 고지식하고 갑갑한 사람인 거 나도 알아. 과하다 싶으면 말해줘. 고쳐볼게. 진심이야.”

현우가 손을 뻗어 하윤의 등을 토닥였다. 그 따뜻한 손길에,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겹겹이 쌓아왔던 감정의 둑이 무너져 내렸다.


하윤은 그제서야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현우를 동경했지만, 그의 높은 기준에 맞추려 애쓰는 동안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자신을 드러냈을 때 그가 실망하고 떠날까 봐 두려웠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이 멎을 즈음, 손으로 눈을 가리고 틈새로 현우의 얼굴을 확인한 하윤이 말했다. “돈이 중요하다는 건… 내 꿈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서 그래. 그래서 너도 걱정 없이 계속 글 쓸 수 있게 해주고 싶어.” 부끄러운 듯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돈 없이도 글 쓸 수 있어. 그리고 돈 벌면서 쓸 거고. 그런 걱정 말고, 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 예전에는 내 글이 영화가 됐으면 했는데, 이제는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나 싶어.” 하윤의 목소리에는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글 쓰는 거 말도 못 하게 좋아했잖아? 그럼 이제는 뭘 하고 싶은데?”


“진짜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래서 돈 벌고 싶은 거야.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생각 안 하고 집중할 수 있게. 그중 한 명이 너야. 그리고… 너랑 글 쓰는 게 재밌었던 것 같아. 근데 같이 글 쓰면서 나는 너만큼은 절대 못 쓰겠더라고. 그래서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도 객관화라는 걸 하고 있는 거지.” 하윤은 고개를 돌리며 살짝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너 없었으면 계속 글 못 써. 서로 다른 영역에 재능이 있는 거지.”

하윤이 갑자기 일어나 현우를 끌어안았다.


“또또또 설득하려고 한다. 크크크. 진짜 너도 참 너다. 아니야, 현우야. 넌 사람의 내면을 그 기민한 분석력으로 해석하고 감정과 엮어서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데 약간의 길잡이를 해준 거지. 그냥 난 네 옆에서, 네가 글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걸 제공하면서 내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켁켁, 숨 막혀. 대신 진짜 계속 같이 글은 써줘. 나 너 없으면 못 써.”


하윤의 품을 빠져나온 현우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우는 하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뭔가 하고 싶다'는 것은 언제나 ‘치열함’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온전히 전해졌기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하윤의 생각을 여전히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던 시절이었기에, 그저 그녀가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현우의 복잡한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하윤은 장난스럽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잡아끌었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사줄게. 가자."입맞춤에 홀랑 넘어간 현우가 앞장서서 아이스크림 할인점으로 향했다.


냉동고 유리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 다른 미래를 꿈꾸면서도 잠시 같은 달콤함에 기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이번 주 분량입니다."


현우가 이야기를 마치자, 화면 너머의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박진태 대표는 마치 오래된 앨범을 들춰본 사람처럼 아련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데 빨려 들어가는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다음 주에는 어떤 내용으로 이어가실 건가요?"


"가능하면 둘의 또 다른 갈등이 심화되면 싶네요. 이제부터는 다양한 다툼으로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과정에서의 성장이 더 두드러지면 좋겠습니다." 이준영 감독이 덧붙였다.


"안 그래도 그렇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써 내려갈 미래의 고통을 예감하듯, 씁쓸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현우가 대답했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한 충돌을 하나씩 꺼내고, 두 사람의 관계 구도가 변화하는 과정을 여러 사건으로 뜯어갈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죠. 아, 그리고 다음 주에는 식사라도 하면서 대면으로 얘기했으면 합니다. 영화 일정 관련해서 할 이야기도 있고요. 두 분 괜찮으시겠어요?"


"네, 좋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 같은 시간에 저희 사옥 앞에서 뵙죠. 고생하셨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박 대표가 화상회의 창을 끄고 회의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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