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리스 부부를 위한 조언

심리학 이야기

by 이상혁 심리상담가

섹스리스 부부를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가설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이 침묵의 시간은 단지 욕망이 줄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욕망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욕망을 표현하거나 나누는 일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정서적 반영이다. 따라서 섹스리스는 단지 성적인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살아가면서도 더 이상 서로를 감각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관계의 질감이 너무 무뎌져버린 결과이다.


사랑이 무르익는다는 것은 열정을 지나 서로의 취약함까지 함께 끌어안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섹스는 더 이상 단순한 욕망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의 신뢰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민감한 행위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함께 지내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부는 서로에게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더 많은 감정을 숨기게 된다. 결국 말이 사라진 자리에 욕망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몸도 자연히 닫힌다. 그래서 섹스리스는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너무 많은 감정의 미해결이다.


감정은 투명하지 않다. 부부는 종종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그 안다는 감각은 낡은 데이터에 기반한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말은 싫어하니까’,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확정해버린 사고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이 감정적 고착 상태가 반복되면, 섹스는 갈망이 아닌 의무가 되고, 친밀감은 권태로 전락하며, 결국 둘 사이의 침대는 편안한 공간이 아닌, 책임과 의무의 상징이 된다. 더 이상 욕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상처 입고 싶지 않은 마음이 먼저 발화되었을 때, 몸은 그 모든 침묵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한다.


그러나 섹스리스는 단지 ‘하지 않는 상태’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하지 않음이 고통스럽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간에 어떤 명시적인 동의 하에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이 말이 품고 있는 정서적 색채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부부는 섹스가 없어도 서로에게 만족한다 말하고, 어떤 부부는 그 결핍이 갈등의 중심이 된다. 그 차이는 서로가 얼마나 자기 욕망에 대해 솔직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지를 가르는 것이다. 성적 욕망은 결코 독립적인 감정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허용되고 수용되어야 살아나는 생명체와 같다.


이 점에서 보면, 섹스리스는 ‘감정의 검열’이 지나치게 심해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다 욕망을 숨기고, 거절당할까 두려워 표현을 미루며, 오해받을까 봐 감정을 포장한다. 이처럼 욕망을 돌려 말하고, 미루고, 숨기게 될 때, 어느새 감정은 서로 다른 언어로 쌓이게 된다. 그런 언어의 단절은 결국 침묵을 낳고, 그 침묵이 몸으로 번져 나간다. 섹스리스는 그러한 언어의 실패 이후에 나타나는 ‘몸의 침묵’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출산이나 육아, 혹은 직장 스트레스처럼 실질적인 피로와 상황적 요인들이 섹스리스를 만든다. 하지만 그것들이 관계 안에서 충분히 이야기되고 공감된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과도기일 수 있다. 문제는 그 피로와 거리감이 말로 충분히 소통되지 않을 때 생긴다. 상대가 나의 피곤함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봐, 혹은 내가 그 사람의 욕망을 짐작하면서도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말하지 않는 관계’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섹스는 사라진다. 우연히가 아니라, 천천히, 조용하게, 서로의 눈 앞에서.


이런 상태에서 회복은 단지 성생활을 재개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다시 몸을 만나는 일은 다시 마음을 만나는 일과 같다. 서로를 감정적으로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얼마나 안전한 존재로 느끼게 해줄 수 있는지,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섹스’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열쇠가 아니라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 된다. 몸이 닿는다고 마음이 닿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닿지 않으면 몸이 닿는 일은 없다. 있어도 가짜다. 그래서 섹스리스 부부가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테크닉이나 조언이 아니라, 감정의 회복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물음에 다다른다. 섹스는 사랑의 본질인가, 혹은 결과인가? 혹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 사랑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육체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완성은 언제나 의미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섹스는 욕망의 언어지만, 동시에 신뢰와 수용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섹스리스는 그 언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순간이며, 의미가 새롭게 재구성되기를 기다리는 고요한 시기다. 이 고요함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어떤 부부는 다시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하고, 어떤 부부는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이 탐색은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묻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왜 이 사람과의 섹스를 피하고 있는가? 그것이 정말 피로 때문인가, 상처 때문인가, 혹은 아직 풀리지 않은 서운함 때문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곧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때때로 욕망을 통해 존재를 확인한다. 상대의 시선 안에서, 손길 안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 안에서. 섹스는 그런 존재의 인정을 몸으로 경험하는 의식이다. 그것이 멈췄을 때, 우리는 단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섹스리스는 관계의 위기가 아니라, 관계의 질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욕망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욕망이 위험한 감정을 불러올까 봐 숨기고 있는가? 이 질문은 쉽게 대답되지 않는다. 대답하려면 고통을 통과해야 하고,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정직해져야 하며, 상대의 침묵 안에서조차 말을 듣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부부 관계의 본령이자, 부부라는 구조가 진정한 의미로 성숙해지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욕망을 존중할 수 있는 감정적 공간을 다시 만드는 일이다. 그 공간이란, 욕망을 표현해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거절당하더라도 그것이 관계의 끝이 아니라는 확신, 내 몸과 마음이 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에게 솔직해지기 전에 스스로에게 먼저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가? 혹은 그저 과거의 친밀함을 되찾고 싶은가? 그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 관계는 다시 숨을 쉴 수 있다.


결국 섹스리스는 섹스 자체 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자 감정의 흐름이 끊긴 곳에서 다시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심리적 여정이다. 이 여정은 결코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때로는 아프며, 무엇보다 둘 모두가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섹스는 그저 그 여정의 한 장면일 뿐,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관계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주 오래전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웃던 밤처럼, 다시 한 번 손끝이 닿았을 때, 말보다 깊은 감정이 오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이 이 침묵의 끝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다.


- 이상혁 심리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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