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이야기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는 법을 묻는다면, 대답은 언제나 애매하고 어둡다. 누군가는 버텨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언젠가 나아진다고 위로한다. 하지만 정작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말들은 너무 먼 곳의 희망처럼 들린다. 누군가의 말로는 닿지 않는 곳,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곳. 그곳에서는 그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시간이 길게 늘어선다. 살아 있는 것이 삶인지, 죽지 않는 것이 삶인지조차 헷갈리는 시간. 그저 시간만이 지나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의지나 용기의 결과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숨을 쉬고 있고, 눈을 떴고, 문득 창밖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살아 있구나’라고 깨닫는다. 고통은 우리를 단련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망가뜨리고, 흐트리고, 부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망가진 채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누군가가 ‘산다’고 정의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우리는 보통 ‘이겨낸다’는 말을 좋아한다. 슬픔을 이겨내고, 고통을 이겨내고, 절망을 이겨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는 그런 말조차 비현실적이다. 20대의 나는 오랫동안 죽고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매일 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라며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것은 이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이었다. 이겨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고통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아주 깊숙이 스며들어 인간 자체의 결을 바꾸었다. 다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된 순간, 비로소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거창한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고통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문득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마주한다. 울다가 커피를 마시고, 어두운 방 안에서 웃긴 영상을 보고, 길가의 작은 꽃을 보며 잠깐 멈춰서는 그런 순간들이다. 그것은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여전히 날카롭다. 다만, 내 안의 또 다른 어떤 무언가가 그것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치유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치유라는 게 애초에 완성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천천히 깨달아 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무너진 채로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픈 채로도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는 법은 거창하지 않다. 그것은 늘 사소한 것에서 찾아온다. 이른 아침 따뜻한 커피 향기 속에서 ‘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라고 확인하는 것.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절망을 지워내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그래, 여전히 아프구나’라고 중얼거리는 것.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지켜보며, 천천히 어둠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가는 것. 그것이 삶의 또 다른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고통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말하라고 강요받는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흘러가고, 남은 건 '고통을 견뎌낸 나' 뿐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값진 의미를 억지로 찾아내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더 솔직한 인간의 태도일 것이다. 의미 없는 하루들이 쌓이고, 목적 없는 시간이 이어지며, 나는 그 안에서도 어딘가 살아 있다.
결국 살아낸다는 건, 고통을 없애거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시간을 견디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드는 작은 감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새벽의 공기, 예상치 못한 낯선 냄새, 오래된 노래 가사 한 줄. 그 모든 것들이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지만, 그 어둠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기척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아내는 법을 배워간다. 그리고 그 법은 말로 가르쳐질 수 없고, 오직 시간을 통과해본 자만이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