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탈중앙화의 이상과 제도화의 필요
크립토, 즉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탈중앙화 화폐는 태생적으로 국가와 제도권 금융에 대한 도전이었다. 비트코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선언은 “은행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 자유롭게 가치 교환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중개자를 배제하고 권력을 분산시키며, 화폐 발행과 금융 서비스에서 국가와 월가의 독점을 깨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이상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전반의 신뢰와 확산을 얻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모든 기술 혁신은 제도화 과정을 거쳐야만 대중화에 성공했다.
인터넷이 좋은 사례다. 초창기의 인터넷은 자유분방한 해커와 학자들의 네트워크였지만, 국제 표준과 정부의 제도적 보완, 그리고 보안 규정이 마련되면서야 비로소 아마존, 구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다. 전기와 철도 같은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민간 기업들이 난립할 때는 속도와 혁신은 있었지만, 전국적 확산과 안정적 인프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규제, 안전 기준, 법적 제도가 필요했다. 따라서 크립토가 진정한 금융 인프라가 되려면 탈중앙화라는 철학적 기반 위에 제도화라는 현실적 토대가 더해져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2. 완전한 탈중앙화의 불가능성
완전한 탈중앙화는 이상적 구호에 가깝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금융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하이먼 민스키는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민스키의 말처럼 시장은 과도한 낙관과 투기로 인해 스스로 불안정성을 키우며, 규율과 안전장치가 없다면 주기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크립토도 다르지 않다. 규제 밖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스템은 언제든지 내부 모순으로 무너질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테라-루나 사태다.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시장 자율”이라는 탈중앙화 철학을 극단적으로 구현하려 했지만, 담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수백억 달러가 증발했다. 이 사건은 탈중앙화만을 절대화할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투자자 보호 장치도, 법적 보완 장치도 없었기에 피해는 그대로 이용자들에게 돌아갔다. 이처럼 규제와 제도적 안전장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대규모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3. 제도화가 탈중앙화를 죽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도화가 탈중앙화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도적 장치와의 결합이 탈중앙화의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다. 비탈릭 부테린이 강조해 온 것도 이 점이다. 그는 블록체인이 국가와 금융권을 완전히 대체하는 시스템이라기보다, 제도와 협력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제3의 영역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이더리움은 검열 저항성과 개방성을 지키는 동시에, 합법적 금융 서비스와 법적 계약과도 호환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셉 스티글리츠 역시 금융시장은 정보 비대칭이 존재하기 때문에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블록체인은 분명 정보 비대칭을 줄여주는 기술적 장점이 있지만, 투자자 보호와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여전히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따라서 제도화와 탈중앙화는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제도화가 없으면 신뢰와 확산이 불가능하고, 탈중앙화가 없으면 혁신성과 개방성이 사라진다.
4. 비탈릭 부테린의 균형론
비탈릭은 이 딜레마에서 접점을 찾고자 했다. 그는 “코드가 법(Law)”이라는 초기 암호화폐 진영의 급진적 구호를 고수하지 않고, “코드와 법의 협력(Law + Code)”이라는 방향을 택했다. 이더리움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제도권과의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그래서 이더리움 위에서 스테이블코인, 증권형 토큰(STO), 탈중앙화 거래소(DEX) 같은 다양한 금융 실험이 가능해졌다.
즉, 비탈릭은 블록체인을 국가의 완전한 대체물이 아니라, 국가와 경쟁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영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그의 구상은 탈중앙화와 제도화가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는 것이었다.
5. 이더리움의 역할 ― 금융의 운영체제
톰 리가 이더리움을 “월가의 암호화폐 플랫폼”이라고 부른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면, 이더리움은 금융과 계약을 실행할 수 있는 운영체제(OS)다. 이더리움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스마트 계약 플랫폼으로, 금융 계약, 자산 발행, 결제 인프라까지 포괄한다. 월가의 비즈니스 핵심이 바로 이런 계약과 거래 관리이기에, 이더리움은 전통 금융이 블록체인 위로 올라오는 데 가장 적합한 기반이 된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 탈중앙화 금융(DeFi), 토큰 증권(STO)이 이더리움 위에서 작동한다. 전 세계 금융 자산의 토큰화가 진행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표준 네트워크도 이더리움이다. 따라서 이더리움은 탈중앙화의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제도권 금융의 요구와 호환되는 플랫폼으로서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6. 스테이블코인의 역할 ― 균형의 장
스테이블코인은 이 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전통적으로 주조이익은 국가가 독점했다. 정부는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해 차입 비용을 줄이고, 월가는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거두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이 발행하면서 준비금을 운용해 이익을 가져간다. 즉, 민간 발권력이 출현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조가 정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준비금을 단기 국채에 투자하면서 정부의 차입 비용을 낮춰주는 효과가 생긴다. 동시에 이용자는 디지털 달러라는 편리한 결제 수단을 얻는다. 따라서 스테이블코인은 탈중앙화된 화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민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플랫폼이 된다.
이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암호화폐가 아니라, 제도권과 탈중앙화 진영이 균형을 찾는 무대가 된다. 미국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7. 전망 ― 균형의 정치학
앞으로 크립토의 미래는 탈중앙화와 제도화의 줄다리기 속에서 열릴 수밖에 없다. 탈중앙화만 강조하면 혁신은 넘치지만 시스템은 불안정하고, 제도화만 강조하면 안정은 확보되지만 혁신은 죽는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핵심 과제다.
이더리움은 개방성과 제도 호환성을 동시에 갖춘 플랫폼으로, 이 균형을 구현할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정부와 민간, 월가와 빅테크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새로운 화폐 형태로 기능한다. 결국 탈중앙화와 제도화의 균형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금융 권력의 배분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문제다. 비탈릭이 만든 이더리움과, 그것 위에서 작동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바로 이 접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