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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제 Jul 02. 2020

최정호 초기 고딕체,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과거

* 양해를 구하는 말씀...

이 글은 최정호 프로젝트 중에서, 앞으로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최정호의 고딕체를 바탕으로 새로운 민부리 활자를 작업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입니다. 후원 마감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씁니다. 이 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미지는 프로젝트 후원 페이지를 통해서 보시길 바라고, 프로젝트 진행과 함께 조금씩 글과 이미지를 보완하겠습니다. (7월 2일 오후 11시 50분. 초고 올림)

https://tumblbug.com/collections/hiut (7월 2일 오후 11시 57분. 링크 첨부)

글 수정 보완 (7월 3일 오전 12시 40분. 김대욱 글 교열 도움)



초기 한글 고딕체, ‘고짓구’


최정호 고딕체를 이야기하기 앞서 한글 초기 고딕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10년 이후 책 제목과 광고에 획의 굵기 변화와 획에 부리가 없는 산세리프 글자체인 ‘고짓구’체가 나타났다. ‘고짓구’는 ‘고딕’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때 고짓구체는 활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몇 글자를 레터링(그려진)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책 제목이나 광고 등에서 글자는 붓으로 써서 활용했었다. 새로 나타난 고짓구체는 기존 글씨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획의 강약과 대비를 없앤 것으로 글자는 네모틀을 채우지 않았고 상하좌우에 여백이 많았다. 


그림. 초기 고짓구체


연구를 통해서 한글 활자가 산세리프 양식으로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를 밝혀야 하나, 동아일보에서 1933년 3월 31일 신문에 새로 개발한 활자 소식에 고딕체를 소개한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책 제목이나 광고에 쓰는 글자는 컸던 반면, 신문에 쓸 활자는 5mm 미만으로 상당히 작은 크기였다. 그래서 작은 크기의 글자를 신문에 썼을 때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글자를 크게, 여백(빈곳)을 없애며 그렸다. 이후 나타난 초기 한글 고딕체 활자는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졌고, 대부분 묵직하고 단단한 인상을 갖고 있다.

그림. 동아일보에서 개발한 활자들


우리는 한글 고딕체(고짓구)가 서구 활자 주조 기술과 조판 문화 유입과 함께 나타난 양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존 조판 문화에서 작은 활자의 크기는 15mm 내외였고, 보통은 그 이상의 큰 활자를 활용했다. 당연히 글자의 조형은 큰 크기를 기준으로 균형과 비례를 맞춰 완성했다. 또한 고딕체가 처음 제작되던 시기와 그 이전, 그리고 지금의 기술은 차이가 크다. 자연스럽게 활자 디자인과 제작에서의 정교함 및 섬세함의 기준과 방식은 시기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글자의 균정함에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 더욱이 그 당시와 지금 우리의 미감(미의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1900년대 초에 등장한 한글 고짓구(고딕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불균질함과 인쇄의 조악함이 만들어내는 투박함이 두드러지고, 물리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단조로운 획으로 인해 무뚝뚝한 인상을 지니게 된다.


초기 고딕체 활자인 1933년 발표된 동아일보의 고딕체는 글씨 뼈대로 만든 활자가 아니지만, ‘ㅅㅈㅊ’의 낱자가 포함된 가로모임꼴 낱글자는 글씨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비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의식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글씨쓰기의 문화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비대칭으로 표현한 낱자는 공간 활용성을 높이면서 결구를 단단하게 만들어 더욱 견고한 인상을 나타내며, 고딕체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인상을 띠게 된다.

그림. 동아일보 고딕체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옛 글자체(활자)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할 때, 문장 방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인들에게 가로짜기는 너무나 당연한 조판 문화지만, 초기 고딕체가 만들어지던 때에 가로짜기는 몇몇 학자의 주장일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기 힘들었다. 당연히 초기에 제작된 고딕체는 세로짜기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세로짜기용 활자의 인상을 지금의 방식인 가로짜기로 조판해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최정호 초기 고딕체의 인상

최정호의 고딕체를 통해서 한글 고딕체의 변화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최정호의 초기 고딕체는 최정호 이전의 고딕체와 같이 글자가 정방형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고, 글자의 획은 단조롭게 생겼으며, 글자의 균형에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미감이 남아 있다. 낱글자를 한 자 한 자 보면 정방형을 가득 채운 글자가 넉넉하고 둔중해 보이지만 글줄에서는 느린 속도감 때문에 오히려 느긋하고 여유롭다.


동아출판사 고딕체와 단조

최정호의 동아출판사 고딕체는 수직과 수평의 획이 낱글자의 정방형 공간을 자로 잰 듯하게 배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낱글자의 획 밀도 차이에 따라서 글자가 뭉쳐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글자체에서 단호하며 강직한 인상이 나타난다. 한글 고딕체에 제작 경험이 적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글자체의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시각적인 규칙보다는 물리적인 규칙을 세우고 따르는 것이 수월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눈여겨볼 글자> 글않막론하고떻


눈여겨볼 부분은 대부분의 글자가 정방형의 틀 안에 가득 채워져 있지만, 섞임모임꼴 민글자의 경우 다른 글자에 비해서 글자의 윤곽이 흐트러지고 있다. 이는 글씨의 미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하며, 이와 비슷한 특징으로는 세로모임꼴 민글자에서 닿자 ‘ㅇ’이 정원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약간의 밝고 경쾌한 인상이 나타난다. 

<눈여겨볼 글자> 과오


동아출판사 고딕체의 획에는 돌기나 표현이 거의 없다. 글씨를 쓰는 순서에서 획이 이어지고 붙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표현 정도만 남아 있고, 이 역시 매우 소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최근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획의 기울기가 수직과 수평으로 표현되고 글자의 공간 배분 역시 물리적으로 균등해진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단순한 구조와 형태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발견된 ‘오래된 미래’ 같다. 

<눈여겨볼 글자> 막및


초기 한글 고딕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고 최정호의 동아출판사 고딕체는 그의 고딕체 중에서 가장 탄탄한 인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하고 있는 활자 ‘단조’는 최정호의 동아출판사 고딕체의 특징을 고스란히 잇고 있어서 강건하고 다부진 인상의 활자다. 그 이름도 잘 어울린다. 


단조. 프로젝트 페이지


삼화인쇄소 고딕체와 담소

삼화인쇄소 고딕체는 앞서 만들었던 동아출판사 고딕체의 구조와 같이 정방형의 공간을 모두 채워 글자를 그렸다. 그러나 ‘ㅅㅈㅊ’과 같은 낱자를 비대칭으로 그리면서 닿자의 크기가 작아졌고 이에 맞춰 ‘ㄹㅍ’ 등의 닿자도 함께 작아진 것으로 판단한다. 닿자의 크기를 약간 작게 그려서 공간이 느슨해졌고 강직한 인상은 줄어들었지만 넉넉하고 여유 있는 인상이 새롭게 나타난다.

<눈여겨볼 글자> 삶사서시, 라피


네모틀 안을 획으로 모두 채울 때, 낱자를 비대칭으로 그리는 것보다 대칭으로 그리면 작업이 수월해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대칭으로 낱자를 그리면 획의 운용의 제약이 생겨서 공간의 편안함이 제한된다. 반면 낱자를 글자의 공간 상황에 따라서 대칭과 비대칭을 섞어서 그리면 그만큼 공간 활용이 수월해져서 글자의 짜임새를 높일 수 있고 고딕체이지만 약간의 편안함(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눈여겨볼 글자> ㅈ 닿자를 포함한 글자, 정


삼화인쇄소 고딕체에서 낱자를 비대칭으로 그린 것은 이후 고딕체에 영향을 줬고, 삼화인쇄소 고딕체 만큼은 아니지만 글자의 공간 상황에 따라서 낱자를 비대칭으로 그리는 고딕체가 많아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1960년대 초에 제작된 삼화인쇄소 고딕체는 요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균형과 비례 등에서 불안함이 있다. 이 문제는 낱자를 비대칭으로 그려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아직 원도활자의 제작 경험이 적었던 것과 세로쓰기 조판에 익숙했던 이유도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눈여겨볼 글자> 시 삶 등의 글자를 세로로 조판하면 글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삼화인쇄소 고딕체를 바탕으로 제작하고 있는 ‘담소’는 낱자의 비대칭성을 주요한 특징으로 삼고 있다. 고딕체의 견고함과 단단함을 유지하면서 공간의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비대칭으로 그린 낱자가 글자 크기와 공간을 균질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최대한 글자의 균형과 비례를 유지하면서 작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잘 극복하면 앞으로 한글 고딕체의 신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담소. 프로젝트 페이지


보진재 고딕체와 지백

보진재 고딕체는 낱글자를 물리적으로 균등하게 공간을 배분한 동아출판사 고딕체의 단호하고 강직한 인상과 대칭-비대칭 형태를 잘 섞어낸 삼화인쇄소 고딕체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인상을 함께 가지고 있다. 닿자와 홀자의 물리적 규칙과 표현 통일성을 시각적으로 조율하면서 동시에 글씨의 비대칭 특징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초기 한글 고딕체 중에서 가장 세련된 인상이다. 

<눈여겨볼 글자> 앞에 예시한 글자들


보진재 고딕체의 판면을 보고 있으면 심지어 윤택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아출판사 고딕체의 탄탄한 글자 윤곽이 만들어내는 단호함에 비해서 잔잔한 윤곽이 요철을 만들어 내지만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여유롭다. 삼화인쇄소 고딕체처럼 일부 낱자의 비대칭적 표현으로 생동감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세로짜기에 맞춰져 있어 닿자와 홀자 사이의 간격이 불균질했던 결구를 안정하게 표현했다. 결국 낱글자 안에서 획 밀도와 공간의 강약이 드러나지만 시각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서 보정되어 차분한 인상이다.

<눈여겨볼 글자> 앞에 예시한 글자들


보진재 고딕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지백은 최정호 활자의 미감과 보진재 고딕체의 인상을 잘 받아내고 있다. 단단히 다져진 획은 견고하고 강직하며, 글자 획 수와 모임꼴에 따라서 글줄에 자연스러운 굴곡이 더해져 차가움보다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치 단호하지만 인자하게, 서두르지 않고 친절하게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보진재 고딕체는 동아출판사나 삼화인쇄소의 고딕체보다는 샤켄이나 모리사와의 고딕체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백. 프로젝트 페이지


최정호의 초기 고딕체를 살펴본 

최정호의 동아출판사 고딕체가 한글 산세리프 활자의 전형을 제시했다면, 삼화인쇄소 고딕체는 글씨의 특징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정호가 동아출판사 고딕체를 제작하기 이전에 제작된 고딕체에 남아 있던 글씨의 특징을 활자에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보진재 고딕체는 앞서 제작했던 두 고딕체를 완숙하게 정리한 결과이자 이후에 제작된 샤켄과 모리사와 고딕체의 시작을 알리는 활자라고 생각한다. 최정호는 한글 고딕체의 획 기울기와 낱자의 모양, 낱글자의 결구 등을 세로짜기에서 가로짜기로 바뀐 한글 조판 환경에 맞춰 진화시켰고 이 모습은 현재 사용하는 한글 고딕체 미감의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덧붙여…

늘 이렇게 옛 글자체를 살펴본 뒤에는 안타까움이 크다. 한글 활자를 둘러싼 생태계가 튼튼하고 건강하지 못해서, 찬찬히 옛 활자를 살피고 그 안에서 멋과 정취를 발견하고 다시 새롭게 하는 일을 못하고 있다. 보면 느낄 수 있겠으나, 늘 생계에 쫓겨,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무엇을 깊이 오래 볼 기회가 없다. 최정호 프로젝트라는 조금은 엉뚱한 기획으로 디자이너를 모으고, 지금의 미감과는 거리가 있는 활자체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과거를 만들고 있다. 단조와 담소 그리고 지백을 통해서 한글 고딕체의 형성과 진화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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