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쉴 땐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도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초조해한다. 요즘의 나는 빨리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더 확실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쉴 때도 쉬지 않을 때도 아직 그려지지 않는 그림들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리면서도 다음 그림을 생각한다. 스스로도 너무 조급함이 느껴진다.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내가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생각이 너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계속 더 많이 그리고 싶어 하고 더 빨리 무언가가 되어있길 원한다. 하지만 내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쉬어줘야 하는데 막상 쉴 때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얼마 전 마음을 먹고 8월부터 그렸던 그림들을 달력에 모아보았다. 날짜에 맞춰 몇 개의 그림을 그렸고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는지 한눈에 보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드로잉을 했다. 어지간히도 불안했나 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그려내야 하고 그리는 이유를 찾아 헤맨다. 왜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쉽지만 어려운 대답이다. 나는 그냥 내가 되고 싶다. 나로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럼 이 행위는 어떻게 나로 살게 만들어 주는지. 내 속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표현되는 지점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 삶의 태도가 작업이 되길 바란다. 지금의 드로잉 시리즈는 어쩌면 그 첫 시작일지도 모른다.
다시 작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선택한 이 길에서 나는 매일의 산책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쉽게 손에 잡히는 재료로 그렸다. 크레파스와 오일파스텔. 어렵지 않게 쉽게 시작하고 싶었다. 작업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었다. 더 이상 많은 의미를 담지 않고 그냥 재미있고 즐거운 행위를 하고 싶다. 현실에 있는 문제의 무게들을 작업에 담아내고 싶지 않아 졌다. 그럼 내 가치관은 작업에 어떻게 표현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내 가치관이 무엇이더라?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계속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냥 그리고 싶다. 하지만 그냥 그려지는 그림은 없을 것이다. 마음껏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게 무언지 잘 몰라 자꾸만 망설이게 된다. 몸은 쉬고 있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그림을 그릴 때보다 더 복잡해진다. 점점 쉬는 법을 잊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