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지난 2월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달이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었다. 일과 일상, 관계까지 삐그덕거리며 돌아갔다. 당연히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날도 있었고, 휴지 한통 쓰면서 운 날도 있었다. 또 어떤날은 기분이 널뛰어, 옆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내가 취약할 때 나타나는 안 좋은 모습을 직면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던데, 이것 또한 정말이었다.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면서 널뛰던 감정이 진정되었다. 건강한 한 끼를 챙겨 먹고, 집 밖에 나가 햇볕을 맞으며 몸과 마음도 조금씩 돌아왔다. 그리고 어떤 일은 내 걱정과 달리 말끔히 해결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일과 삶이 멈춰있었다.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고 최소한으로만 일했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주된 세가지 생각을 기록해본다.




1. 핵심 신념


인사이드아웃2에는 자아 나무가 나온다.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신념이 생기고, 이 신념이 모여서 성격이 된다. 나는 두 가지의 핵심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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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름답고 믿을만하다'

'나는 내가 뜻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2월 동안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두가지의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수정되었다.


'세상과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돼'

'내 통제 밖에 있는 일은 무수히 많아'


지금 돌이켜보면 수정된 신념은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쉽게 보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세상의 풍파를 겪어보지도 않고, 그래서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2. 자유와 책임


지금껏 자유롭게 살아왔다. 1인분의 삶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지면 되는 거였으니까. 계속해서 1인의 삶만 책임지면서 가볍게 사는 방법도 있다. 한때는 그와 같은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 대해 점점 알아갈수록 '나는 좁고 깊은 관계를 원한다는 걸' 깨달아간다. 한 사람의 일생을 깊게 탐구하고 동행하는 것이 행복하다. 무한한 사랑을 쏟을 수 있는 가족이 있는게 좋다. 그렇다면 자유의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 자유를 내려놓고 책임을 짊어야 한다.


30대의 나에게 자유는 '일'의 영역이고, 책임은 '가족'의 영역이다. 밖에서 쏟던 에너지를 안에서도 쏟을 수 있도록. 일의 방식을 조정할 때가 되었다.


<퍼스널 MBA> 책에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단 네 가지밖에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완료 / 삭제 / 위임 / 연기


지금까지는 혼자 책임을 다 지는 '완료'의 방식을 택했다. 내 손을 거쳐서 완료가 되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었다. 이제 더 적극적으로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것이다.


불필요한 일은 과감히 없애는 '삭제'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누는 '위임'

급하지 않은 일을 미루는 '연기'


삭제, 위임, 연기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몽땅 끌어안고 나아가는 것만이 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삭제를 해도 위임을 해도 연기를 해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3월부터는 죄책감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 참이다. 그래야지 일도 지속 가능하고, 일에 쏟던 에너지를 가족에게 돌릴 수 있다.




3. 효율주의


나는 효율주의에 빠져 살았다. 시간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제한된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은 것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처럼 많은 현대인들도 '효율'을 추구하는 삶에 익숙할 것이다.


효율은 '노력'에 맞닿아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오력을 해야 한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 웬만한 것은 이룰 수 있다는 믿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덜 노력해서라고 탓하는 세상. 이와 같은 노력만능주의가 인간을 효율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이전에는 시간을 들여서 했던 일들이 AI의 발전으로 몇 초면 완성할 수 있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투입된 시간과 노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창의성, 몰입, 스트레스 관리와 같은 측정불가했던 가치들이 일을 하는데 더 중요해졌다.


딸깍하면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는, 나태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노력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은 없다. 그렇지만 시간을 더 들인다고, 더 많이 해냈다고 인정받는 세상은 끝난 거 같다.


효율의 독소를 빼보려고 한다. 빽빽하게 할일을 세워놓고, 숨 가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여유를 가능한 많이 장착해보려고 한다.




숨고르고 나니 3월이 되었다.

새로운 생각과 신념으로, 다시 기운 차리고 시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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