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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Feb 03. 2020

잘 지내고 있는 밤

이사 가기 5일 전,

 5일 후면 4년 간 살았던 이 곳을 떠난다. 4년 동안 참 많은 곳을 갔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오늘만 해도 처음 보는 독립 서점을 한 군데, 처음 알게 된 북 카페 한 군데를 들렀다. 독립 서점은 작고 포근했고, 북 카페 사장님은 친절하고 유쾌한 분이셔서 (짧았지만)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두 군데 다 집 근처 20분 안팎에 위치한 곳이었다. 이렇게 주변에 무심한 내가 새로 이사 가는 곳에서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골목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프랜차이즈와 대형 마트로 쉽게 발길을 옮기는 사람이다. 아주 쉽게 기성품을 선택하고, 찬찬히 오래 보지 않는 편이다. 내게는 필요한 것이 늘 정해져 있고 의외의 감성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가끔 의외의 감성을 만나면 참을 수 없이 들떠버리고 만다. 그렇게 오늘도 독립 서점에서 책을 세 권이나 구입하고, 검정색 에코백을 사은품으로 받았다.


 4년 간 같은 지역에 머무르면서, 2년 동안 지금 집에 살았다. 이 집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고 참 많은 작당모의가 있었다. 그중엔 실패한 계획도 있고, 멋지게 성공한 계획도 있다. 결과물로 남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소중했음은 당연지사다.


 이 집에서 나와 몇 개월을 동거 동락한 친구도 있었고, 잠깐 놀러 왔다가 일주일을 눌러앉아 쉬고 갔던 친구도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씩 꼭 이 집에 들르던 친구도 있었고, 내가 없는 새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도 한 두 명이 아니다. 꽤 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담은 집인 셈이다. 2년 동안 (집순이인) 나는 이 집에서 정말 많은 위로와 행복을 얻었다.


 온 진심으로 떠나기 아쉽지만, 역사에만 머무를 수 없기에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사 가는 곳은 낯선 곳이다. 서울 곳곳을 참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안 가 본 곳이 아직도 많았다. 다음 집은 그런 곳이다. 지금 사는 집은 햇빛이 잘 들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포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 집은 어딘지 '차갑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채광이 썩 좋지 못한 것도 한몫하겠지만 그 외의 요인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테리어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볼까 싶다. 뭐, 아직 구체적인 생각은 없지만.


 새 집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겠지? 거기서도 행복할 수 있겠지? 무서운 건 많지만, 또 한걸음 걸어 나갈 수 있겠지? 그런 의문이 자꾸만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이렇게 계속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러면 나는 짐짓 여유로운 체하면서 침대에 앉아 책을 집어 든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을 넘긴다.


 저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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