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od good bye를 보고, 화사와 박정민에게 바치는 헌사
청룡영화제에서 멋진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사로잡기 이전에도, 우연히 들은 이 노래의 구절은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는걸까? 이 짧은 글은 그 질문에 대한 작은 탐구고, 동시에 화사와 박정민에게 바치는 헌사다.
Good Good Bye
화사는 좋은 가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 화사에게 부당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Good Good Bye"라는 노래와 비디오, 그리고 공연 퍼포먼스는 그런 안티들을 옷깃에 묻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녀는 원래부터 매력 넘치고 노래 잘하는 멋진 가수다. 그리고 박정민, 화사가 삼고초려하며 섭외했다는 그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훌륭한 콘텐츠들이 그렇듯, 이 노래는 우리 안의 무엇을 건드린다. 우리가 정의하기도 전에 우리 속에 이미 있었던 무언가를. 이 글은 그 무언가를 쫓아가는 작은 여정이다. 왜 그 노래는, 가사는, 뮤직비디오는 이렇게 아련하게 아름다웠을까? 나는 음악과 뮤직비디오, 그리고 청룡영화제 시상식 공연을 반복해서 보며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쫓아갈 실마리는 그게 아마도 우리 세대에 흔치 않은, 소중하지만 우리가 어느덧 발견하기 어려워진 무언가를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안녕은 우릴 아프게 하지만 우아할 거야
나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넌 크게 웃어줘
비로소 느껴지잖아
눈물은 고이고 찬란하게 빛나
우린 좋은 안녕 중이야"
그것은 당연히 우리 안의 개인적인 경험, 감정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 멋진 커플이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이 다수의 경험과 감정을 건드리는 것, 즉 '특정성'이 '보편성'에 호소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위대한 이야기(음악도 이야기의 한 형태다)의 특징이 아닌가?
이 노래는 사랑의 시작이 아닌 이별과 그 이후를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랑은 영원을 꿈꾸지만, 그 영원의 소망은 그 꿈을 꾸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시간은 모든 걸 과거에 존재했던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꿈을 이뤘다 해도 그 꿈은 과거에 꾼 꿈이며, 사랑을 추동하는 호르몬의 분출이 유한한 인간의 사랑을 영원하게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종료로서의 이별은 지나간 시간 속에 보존된 사랑의 편린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마치 보존제에 절여져 얇은 유리막 속에 갇힌 생체조직의 조각처럼.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Love Letter, 로미오와 줄리엣, 카사블랑카, 코파카바나...
사춘기에 만난 로미오와 줄리엣이 갱년기 이후 어떤 파국을 만났는지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거나 즐거운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물론 똑소리 나게 야무진 춘향이는 좀 달랐을 것 같기도 하다. 현명한 그녀는 유년의 정열이 사라지고 성숙하고 새로운 사랑의 단계로 넘어섰을 수도 있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다른 형태의 관계를 모색했을 것 같지만, 그건 러브스토리로 시작한 장르가 영지물(또는 가족극이나 경영 시뮬레이션)로 바뀌는 것 같은 이야기다.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사랑의 이야기가 이별로 끝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인공이 성장하며 변화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 우리를 포함해서 대중이 사랑하는 이야기는 선형적이다. 이별이라는 순간 마지막으로 정지된 사랑의 편린은 우리가 가장 아름답던 시절, 젊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랑의 상실에 어린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영원히 보존해 줄 것이다.
우리가 이 노래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별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사와 박정민이 보여준 특수성이 그걸 보는 수많은 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들 스스로의 이별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저렇게 아름답지 못했던 이별의 장면들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술을 많이 마신 밤 결국 참지 못하고 걸었던 전화, 상대가 받지 않는(진짜 고맙다!) 전화처럼, 이불을 걷어찰 기억들. 그러나 내가 이별과 관련해서 씁쓸하게 떠올리는 것은 나와의 이별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읽힌 다른 나쁜 이별들의 흔적이다.
명백히 다가온 이별 앞에서 상대의 두려움을 읽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별 앞에서 그저 슬퍼할 뿐, 상대를 더 이상 상처 입히거나 할 일이 없고, 만나는 중에도 내가 그런 행동을 한일이 없는데, 왜 저 사랑스러운 사람은 이 슬픈 이별 앞에서 나에 대해 두려움을 비치는 것일까? 너무 슬퍼서 당시에는 그 슬픔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 그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런 것들이 이제는 명확하게 이해된다.
그녀들은 분명 나 이전에 이별 앞에서 남자의 폭력이나 다른, 아름답지 못한 상황을 겪었으리라. 그래서 그저 슬픔으로 충만해야 할 이별의 순간에도 그 두려움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경우가 왜 없었겠는가? 나도 학부 시절, 이별 앞에서 남자친구의 폭력을 두려워한 여자 후배의 부탁으로 어색한 배석을 한 경우도 있었다. 상대가 원하지도 않은 애정을 퍼붓고 그 이자까지 기대했던, 신촌의 한 대학을 다니는 철없는 남학생의 분노와 폭력시도는 그 자리에 딱히 그보다 더 성숙하지도 못한 내가 날린 몇 대의 싸대기로 간단히 진압됐다. 지금보단 분명히 야만적인 세상이었고 나 역시 그 야만의 작은 한 조각이었다. 변명하자면, 폭력을 다루는 프로토콜도 지금과는 다르던 시대다.
대개 이런 원시적인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 이야기의 엔딩은 주인공 기사가 악당이 습격한 미인을 악당에게서 약탈하면서 끝나지만, 이 이야기는 아드레날린을 가라앉히며 까진 주먹을 쥐고 집에 들어가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로 끝났다. 생각해 보면 똑똑한 후배가 아니었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침착하게 습격을 대비한 둘시네아 공 주지 헬멧대신 냄비를 뒤집어쓰고 얼떨결에 참전한 기사 워너비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에게 미숙하나마 도움이 될만한 이런 방패막이가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 페이스북 친구분의 표현대로라면, '3대 100도 못 칠 것 같은' 박정민 이란 배우가 이 음악의 드라마에서 그토록 멋지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 있지 않을까? 멋진 인간은 해롭지 않다.
이별은 지금까지 지속된 사랑의 순간들을 정의하고 마무리한다. 미숙한 사랑은 미숙한 이별로 끝나고, 우리가 미숙하게 시작했을 망정 그 사랑이 우리를 성숙하게 해 줬다면 이별은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서툴고 우연적이라도 좋다. 그게 오히려 바람직하기도 하다. 준비되고 계산된 이야기가, 사랑의 시작이 아름답다 생각되지 않는다. 정말로 어떤 이야기를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엔딩이다. 심지어 그 이야기의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멋지다면, 그 엔딩은 멋질 것이다. 그리고 그 엔딩은 그 둘이 만들어낸 모든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든다. 이별의 모습은 그들의 사랑이 정말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와도 같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나는 이 시가 담긴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이 좋았다. 훈련소에 몰래 갖고 들어갔고, 훈련소를 퇴소할 땐 다 외우고 있었다. 학부 1학기 교양문학 시간에 교수님이 누구든 혹시 시를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냐고 해서 이 시를 외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젊디 젊은 나이에 사랑했던 시, 그 시를 쓴 시인이 당시의 나보다도 더 젊었을 때 쓴 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시인은 사랑에 빠져있고, 자신의 사랑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직하고 명민한 시인의 눈에는 자신의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보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젠가 다가올 이별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의 자세를 갖는 것뿐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나의 사랑이 적어도 정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직함 없이 사랑할 순 없다. 지금 오고 있는 눈이 그칠 것을 아는 사람이 갖는 기다림의 자세는 눈 오는 시절이 지나고 새로운 눈이 찾아올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시간과 변화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대부분 실패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적어도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상대를 위하여, 상대와 함께 만들어간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사랑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허튼 약속을 하지 않되 그 한계 내에서도 당신에게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이다. 멋진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 멋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이별은 멋진 이별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이별과, 사랑과, 멋진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것.
그게 이 'Good Good Bye'라는 노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