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의 위로였던 당신께, 故 이선균 배우를 기리며.
나의 아저씨를 다시 정주행 하기까지 나는 오래 망설였다.
한 작품을 다시 본다는 건 대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화면 속 인물과 현실의 시간이 겹쳐지면서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을 다시 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배우를 잃었고, 그 상실은 아직 현재형이다. 박동훈의 낮은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 자칫하면 애도의 자리를 다시 밟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작품이 슬픔을 가두는 금기가 아니라 여전히 애절한 추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동훈의 친구이자 상훈의 아내 조애련이 말했듯, 누군가의 이름을 금기어로 묶어 두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사이가 아니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잠시 멈춰 서서 반갑게 아는 척할 수 있는 사이로 남기를. 나는 이 작품과 그리고 그 얼굴과 그렇게 다시 조용히 마주 앉고 싶었다.
1) 자기 구원과 나의 그림자
-닮은 꼴의 중력과 위악의 연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지옥을 상대의 눈동자에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동훈과 이지안,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전 이미 서로의 ‘그림자’를 알아본다. 동훈은 지안의 거칠고 마른 얼굴에서 자신이 평생 억눌러온 생의 피로를 읽고, 지안은 동훈의 무거운 발걸음에서 자신이 결코 도망칠 수 없었던 가장의 무게를 발견한다. 이것은 연민이기 이전에 지독한 ‘자기 확인’이다. 동훈에게 지안은 나의 비극을 선행 학습 중인 '어린 자아'이며, 지안에게 동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패배하고 있는 '나의 미래'이다. 그들은 같은 섬에 유배된 자들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섬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자기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다.
반면, 이광일과 이지안의 관계는 비극의 씨앗을 공유한 ‘자기모순적 위악’의 극치이다. 광일은 지안을 괴롭힘으로써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살인 현장을 공유한 유일한 목격자이자 공범이다. 그는 지안을 증오하지만, 사실은 지안이 겪은 지옥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지안이 사라지면 광일의 고통 또한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는 강윤희와 도준영이 공유하는 세속적 욕망과 불안한 소속감과는 궤를 달리한다. 강윤희와 도준영의 결합이 결핍을 메우기 위한 가짜 연대라면, 동훈과 지안의 결합은 서로의 구멍을 응시하는 진짜 연대이다.
박기훈과 최유라의 관계 또한 전복적이다. 한때 천재로 불렸으나 망가진 감독과 그에 의해 망가졌던 배우. 이들은 가해와 피해의 자리를 바꾸어가며 서로의 밑바닥을 확인한다. 우리가 나를 닮은 그림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내 안의 어둠을 설명할 언어가 부재할 때, 저기 누군가 똑같은 어둠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생은 비로소 ‘해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동훈이 지안에게 건네는 말들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10년 후든 20년 후든 길에서 너 만나면 아는 척할 거야. 껄끄럽고 불편해서 피하는 게 아니고 반갑게 아는 척할 거라고."
이 선언은 타인을 향한 약속인 동시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도 화해하겠다는 자아의 결단이다.
2) 측은지심과 악수의 기원
-신뢰의 무게
누군가가 깊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쉽게 사랑이라 부르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보다 먼저 오는 감정,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이다. 동훈이 지안에게 건네는 밥과 술은 연애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조용한 요청이다.
어릴 적 나는 악수는 신뢰라고 배웠다. 상대의 손을 꽉 잡는 건 상대를 믿는다는 뜻이라고. 그러나 역사 속 악수의 기원은 달랐다. 상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뢰의 뿌리가 얼마나 서늘한지 깨달았다. 믿음은 그렇게 늘 공포 위에 세워진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차가운 기원을 인간적인 온기로 덮는다. 동훈은 지안이 도청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기가 그녀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였음을 이해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선택, 그것이 이 작품이 말하는 신뢰이다.
“나는 너희 할머니 장례식장에 갈 거고, 너는 우리 엄마 장례식에 와.”
이 약속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건네는 악수이다. 장례식은 인간이 가장 무력해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서로를 지켜보겠다는 말은 서로의 가장 약한 순간까지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손의 온도는 이제 무기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상실을 나누는 의식이 된다.
3) 공유할 수 없는 고통과 치유의 언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쓸 수는 있어도, 대신 아파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연대는 언제나 어딘가 모자란다. 끝까지 함께 가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각자의 몸으로 돌아와야 한다. 동훈은 성실한 가장이고 묵묵한 기술자이다. 무너질 듯한 구조물을 계산으로 붙들어 세우는 사람.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은 늘 보이지 않는 압력에 눌려 있다.
그가 말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외부에서 밀어붙이는 힘과, 안에서 버티는 힘. 건물은 그렇게 서 있지만,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조금씩 닳는다. 그의 말은 정확하다. 그래서 더 쓸쓸하다. 정확하다는 건, 이미 많이 견뎌봤다는 뜻이니까.
동훈이 혼자 중얼거리듯 내뱉는 “괜찮아”는 위로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주문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겨우 붙여놓는 붕대 같은 말. 상처를 낫게 하지는 못해도, 더 벌어지지 않게 붙들어두는 말.
하지만 지안이 되돌려주는 말 “아무 일도 아니에요.”는 다르다. 그 말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혼자 두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 아픔을 정확히 보고 난 뒤에 해주는 말은 이상하게도 무게를 조금 나눈다. 고통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그것을 들고 있는 손이 하나 더 생긴 느낌.
지안이 도청기로 동훈의 숨소리를 듣던 장면을 떠올린다. 어두운 방,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숨. 말은 없지만, 살아내는 소리가 있다. 그 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누군가도 이렇게 힘들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 나만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동훈은 말한다.
“버티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그 말은 체념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약속처럼 들린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무너지면서도, 끝내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겠다는 약속.
우리는 서로의 지옥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대신 그 지옥이 존재한다고, 네가 거기 있었다고, 내가 봤다고 말해줄 수는 있다. 그 증언이 때로는 치료보다 깊다. 고통은 공유되지 않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눈빛은 공유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위로는 거창하지 않다. 손을 붙잡고 끌어올리는 구원이 아니다. 그저 옆에 앉아,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밤을 건너는 일.
4) 나 홀로 가벼워질 수 없는 마음과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할 나의 몫!
마음은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 슬픔은 무겁고,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하려 할 때 영혼은 침몰한다. 겸덕스님이 정희를 찾아온 이유는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는 출가를 통해 세속의 번뇌를 끊어냈다고 믿었으나, 여전히 정희라는 ‘부채’를 안고 살았다. 그가 정희 앞에 서는 것은 그녀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슬픔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자신도 정적(靜寂)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타인에게 남긴 상처를 외면하고서는 결코 혼자 가벼워질 수 없다는 준엄한 진리이다.
동훈이 텅 빈 거실에서 혼자 오열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가장 아픈 클라이맥스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보이고, 지안도 안전한 곳으로 떠났으며, 일상은 평온을 되찾은 것 같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눈물. 그것은 그가 평생 '내력'으로 버텨왔던 모든 외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아다. 그는 타인을 구원하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으깨졌는지를 돌보지 못했다.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피를 나눠주는 일과 같다. 동훈의 눈물은 이제야 비로소 타인의 몫이 아닌 '나의 몫'으로서의 슬픔을 오롯이 감당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과 함께 있으면 덜 외로울 것이라 믿지만, 진정한 성숙은 홀로 있을 때의 무게를 견디는 힘에서 나온다. 동훈은 지안을 통해 자신의 바닥을 보았고, 그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생의 무게를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마음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기훈이 유라에게 건넸던 거친 위로들, 정희가 동네 사람들과 나누던 쓸쓸한 농담들 속에는 이처럼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지 않는 자들의 결기가 서려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다룰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5) 결자해지와 평온함
마지막 회,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재회한 동훈과 지안의 모습은 드라마가 도달한 최고의 성취이다.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서로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주체로 서 있다. 지안은 밝고 씩씩한 직장인이 되었고, 동훈은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며 평온을 찾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거리감’이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지 않는다. 다만 정중하게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이 적절한 거리가 바로 박해영 작가가 말하는 ‘편안함’의 실체이다.
"지안(至安), 편안함에 이르렀나?" 동훈의 이 물음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지안은 대답한다. "네. 네." 이 짧은 대답 속에는 과거의 모든 상처와 비극의 그림자, 그리고 지독했던 가난과 고립이 모두 씻겨 내려간 뒤의 맑은 영혼이 담겨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얽힌 매듭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매듭이 있었던 자리의 흉터를 동정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동훈은 지안에게 희망을 꿈꾸게 했고, 지안은 동훈을 다시 숨 쉬게 했다. 그들은 이제 서로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는 사이가 되었다.
카페를 나서는 지안의 뒷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동훈의 미소는 비극이 어떻게 숭고함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가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춥지는 않을 것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껄끄러움 없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사이.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선,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따스함이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내력으로 온전히 서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우연히 다시 만난 누군가에게 기꺼이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