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가 닿지 않는 마음의 점성

영화 <장손>

by 달빛바람

개요 가족 대한민국 121분

개봉 2024년 09월 11일

감독 오정민


1. Opening 오프닝

-끓는 김 속에 가려진 손들의 노동


이 ​영화는 관객의 시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미장센 대신, 귀를 멍하게 만드는 자욱한 증기와 날 선 기계음, 그리고 그 소음을 묵묵히 견뎌내는 분주한 손등 위에서 시작된다. 콩을 불리고 갈아내며, 적절한 온도로 식힌 뒤 간수를 맞추는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식재료의 제조 공정을 넘어선 어떤 고독한 수행(修行)의 영역처럼 보인다. 21세기라는 디지털과 자동화의 시대, 효율이라는 이름의 편리함이 가문 깊숙이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부의 마지막 점성과 그 미묘한 완성도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수치화된 기계가 아니라 오랜 세월 단련된 사람의 예민한 감각이다. 끓어오르는 가마솥의 열기는 화면 밖 관객의 피부에까지 전해질 듯 뜨겁고 습하지만, 그 앞에 선 이들의 표정은 감정이 소거된 듯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오프닝은 현대의 속도전 속에서 '전통' 혹은 '명가'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박제된 가업이 실상은 얼마나 고단하고 숭고한 육체적 노동에 기대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지를 서늘하게 증명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할머니의 굽은 등과 며느리의 젖은 앞치마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김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따스한 온기라기보다, 누군가의 생의 진액을 끝없이 짜내어 유지되는 가문의 관성처럼 느껴진다.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노동을 지탱하는 개별 주체들의 삶은 마모되어 가고 있으며, 카메라는 그 마모의 흔적을 일절의 미화 없이 응시한다. 이 집안이 지닌 비극적 성실함은 그렇게 증기 속에 가려진 채, 그러나 누구보다 분명하게 영화의 서막을 연다.



​2. 제사 준비

-여름의 열기와 꺾이지 않는 고집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달빛바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달빛바람 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2,099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스릴러가 된 교실, 범인은 '시스템'인가 '인간'인가